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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진상 알린 미국 인권운동가 패리스 하비 목사 별세

입력 | 2026-05-14 10:34:00


패리스 하비 목사(왼쪽)는 군사정권 인권 유린 실태와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인권 운동가다.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 국제 대변인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찬호 씨 제공

5·18민주화운동 직후 미국인 의사 2명을 광주에 보내 진상 조사서를 만든 미국 인권운동가 패리스 하비 목사(1935~2026)가 작고했다. 이 문서는 해외 인권 단체가 작성한 첫 오월 광주조사서다. 5·18기념재단은 최근 성명을 통해 “5·18민주화운동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소중한 동지이자 수호자였던 하비 목사가 지난달 16일 작고했다. 추모한다”고 밝혔다.

최용주 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장(박사)은 논문 ‘광주항쟁과 초국적 후원 네트워크’를 통해 “하비 목사는 5·18민주화운동 직후 미국에서 의사 김영송 씨와 글렌 고든 씨를 불러 5·18 피해를 확인했다”고 14일 밝혔다.

두 미국인 의사는 광주의 참상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다가 신군부에 며칠간 구류됐다. 둘은 1980년 6월 22일부터 28일까지 광주를 방문해 기독병원에서 찰스 베스 헨틀리 선교사를 만나고 5·18 사상자 등을 조사했다. 신군부가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을 진압한 지 28일이 지난 시기였다.

두 의사가 작성한 8쪽짜리 조사서 ‘광주 진상 규명 임무’(Fact-Finding Mission on Kwangju, Korea)에는 계엄군의 과잉 진압 실태와 희생자의 사망 원인을 조사한 결과를 적었다. 이들은 계엄군이 일반 탄환을 사용하지 않고 인체에 치명적이어서 국제법상 금지된 연성탄을 쓴 것으로 의심된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일부 전문가는 “미국인 의사 2명이 5·18 희생자의 X-레이 사진, 진료 기록을 보고 부상자 면담을 한 뒤 연성탄 사용 의혹을 제기했으나 계엄군의 M16 소총 총알은 납탄으로 몸에서 조각날 수 있다”며 연성탄 사용 가능성을 낮게 분석했다.

신군부는 김 씨에게 “조사서를 미국에 가져갈 수 없다”며 막으려 했다. 하지만 김 씨는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인 로버트 리치 씨를 만나 조사서를 전달하고 설명할 수 있었다. 김 씨는 독립운동가로 초대 서울시장을 역임한 김형민 씨(1907~1998)의 아들로 알려졌다.

하비 목사는 생전에 “5·18 진상 조사를 위해 북미한인인권위원회(NACHRK)가 의사 2명을 광주에 보냈다”고 말했다. 하비 목사가 북미한인인권위원회 실무 책임자인 사무국장으로 활동한 것을 감안하면 조사서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분석된다.

패리스 하비 목사(왼쪽 첫 번째)는 군사정권 인권 유린 실태와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인권운동가다.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 국제 대변인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찬호 씨 제공

하비 목사는 1959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돼 노동자와 도시 빈민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며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미국 지원 반대 성명을 내는 등 한국 인권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그는 1979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귀국한 이후 북미한국인권문제협회를 설립하는 등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고 김대중 대통령 구명운동을 벌여 사형 집행을 막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데도 공헌했다. 또 5·18 마지막 수배자로 불리는 고 윤한봉 씨의 밀항을 도왔다.

최 박사는 “하비 목사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 국제사회와 연결되는 창구 기능을 했던 인권운동가로 신군부 통제로 5·18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광주의 참상을 해외에 알린 통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하비 목사는 한국의 군부 독재 정권의 실상과 5·18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외국인 선교사, 성직자가 참여한 비밀 인권 모임인 월요모임의 핵심 회원이었다. 월요모임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방한한 험프리 미국 부통령을 만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인권탄압 등을 설명하기 위해 결성됐다. 

월요모임은 한국 독재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정례화됐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월요모임 활동을 더 강화한 계기가 됐다. 월요모임은 매주 월요일 밤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출신 개신교와 가톨릭 선교사의 집을 번갈아 가며 모였다. 월요모임은 신군부의 감시와 억압 속에서도 광주 진상 조사서, 각종 서신을 작성해 5·18 참상을 세계에 전했다.

패리스 하비 목사가 1991년 2월 9일 푸른 눈의 시민군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돌린저 씨에게 쓴 편지.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하비 목사는 1991년 2월 9일 푸른 눈의 시민군으로 불리는 데이비드 돌린저 씨(72)에게 한국 민주주의 상황에 대해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서 “한국과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 인권에 대한 새로운 헌신과 한미 양국의 올바른 관계가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고 밝히는 등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5·18기념재단은 “하비 목사는 계엄군의 유혈 진압으로 오월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될 위기에 굽힘 없는 용기로 미국 의회와 국제사회에 한국 인권 실태를 고발했다”며 “광주가 고립된 섬이 아닌 인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는 민주주의 성지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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