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푸른 눈의 증인]〈1〉 미국 평화봉사단의 헌신 5·18 목격한 데이비드 돌린저 씨 관련 문서-그림-신문 등 74점 기증 조작 거론 ‘독침 사건’ 입원 기록도
1980년 5월 광주는 고립무원이었다. 시민들은 신군부에 맞서 ‘독재 타도’, ‘민주화’를 외쳤지만 철저히 고립됐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국민들이 국회로 달려와 이를 막아낸 상황과는 달랐다.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차단된 채 주먹밥을 나누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10일 만에 큰 희생을 치르고 신군부에 의해 진압됐다. 외로웠던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한 푸른 눈의 증인들이 있다. 이들의 헌신과 용기, 인권 이야기를 세 차례에 걸쳐 다룬다.
미국인 안과의사인 폴 코트라이트 씨(왼쪽). 그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5·18의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을 다룬 ‘5.18 푸른 눈의 증인’이라는 책을 썼다. 광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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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린저 씨가 기증한 자료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5·18 당시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거론되는 ‘독침 사건’ 당사자의 입원 기록이다. 독침 사건은 1980년 5월 25일 옛 전남도청에서 장모 씨(당시 23세)가 “괴한에게 독침을 맞았다”고 주장하며 쓰러진 사건이다. 당시 독침을 맞지 않은 장 씨는 상처 부위를 빨아주는 척한 정모 씨(당시 23세)와 함께 “치료를 받겠다”며 전남대병원으로 간 뒤 행방을 감췄다.
1980년 5월 25일 전남대병원 응급실에 장모 씨가 도착했다는 내용을 담은 메모. 장 씨의 주소, 환자번호 등이 적혀 있다.
또 다른 자료는 평화봉사단 동료였던 캐롤린 트르비틸 씨가 1980년 11월 9일 돌린저 씨에게 보낸 편지다. 캐롤린 씨는 돌린저 씨가 1980년 6월 10일 광주에서 촬영한 5·18 참상 사진 등을 챙겨 한국을 떠났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인권단체 관계자들을 접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결과 1980년 7∼8월 AFP통신과 스웨덴 신문 다겐스 뉘헤테르, AP통신, 미국 밀워키저널 등에 5·18 참상 관련 기사가 실렸다. 당시 스톡홀름 주재 한국대사관은 자료 출처를 파악하려 했고, 한국 외교부는 미국 대사관에 유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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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린저 씨 외에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5·18을 목격한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는 폴 코트라이트 씨와 팀 원버그 씨(1954∼1993), 주디 체임벌린 씨 등 모두 4명이 있다. 미국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설립한 자원봉사기관으로, 한국에는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약 2000명을 파견했다. 평화봉사단원들은 오월 진실 규명과 연대 활동에 나서면서 신군부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한국 활동을 종료했다.
미국인 안과의사인 폴 씨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5·18 참상과 시민들의 저항을 기록한 ‘5·18 푸른 눈의 증인’이라는 책을 썼다. 책에는 1980년 5월 14일 ‘서울의 봄’부터 5월 26일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 미국대사관으로 향하는 과정이 담겼다. 폴 씨는 올해 5·18민주화운동 46주년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팀 씨는 5·18의 긴박했던 열흘 동안 항쟁을 목격하고 기록했다. 당시 계엄군의 곤봉에 맞는 등 위험을 겪으면서도 5·18 참상을 기록했고, 광주시민을 향한 공습 계획도 남겼다. 그는 미국 하와이대에서 5·18을 주제로 한 최초의 영어 논문인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주디 씨는 5·18 당시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씨 등과 함께 참상을 지켜봤다. 또 동료들과 함께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하자 인근에 숨어 있던 시민군을 피신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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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정치 상황 등을 빗댄 풍자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풍자화 작가를 찾기 위한 작업을 벌일 방침이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