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연명의료 거부”에도… ‘가족 반대-환자뜻 불확실’ 이유 17%만 이행[‘임종 난민’ 갈길 먼 존엄한 죽음]

입력 | 2026-05-06 04:30:00

종이 위 멈춘 ‘존엄하게 죽을 권리’
65세이상 84% “연명의료 안받을것”
“부모님에 불효” 자녀들 반대 많고… “정신 온전하지 않아” 가족뜻 따라
호스피스 부족해 연명의료 의존도… “본인 뜻 우선 임종계획 정착돼야”




 ‘연명의료결정제도’ 도입 이후 지난달 말까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335만 명을 넘었지만 실제 이행률은 낮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최근 치매를 앓던 어머니를 떠나보낸 김지영(가명) 씨는 임종 전 인공호흡기를 달고 고통스러워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한다. 김 씨의 어머니는 10여 년 전부터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수차례 밝혔지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같은 공식 서류는 작성하지 않았다.

지병이 급속히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에게 의료진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혈압 상승제를 투여했다. 가족들은 “이제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리자”고 뜻을 모았지만 병원 측은 환자의 의사 확인 없이 의료 행위를 중단하면 안락사가 된다며 연명의료 중단을 거부했다. 김 씨는 “어머니 정신이 온전할 때 사전의향서를 쓰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했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줄이고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환자의 뜻이 국내에선 여전히 실현되기 어렵다.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사전의향서 종이 위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나답게 죽을 권리’ 박탈당하는 환자들

5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가장 최근 조사인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서 65세 이상 고령층의 84.1%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서 연명의료를 거부하겠다’고 했다.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고, 병원비와 돌봄 부담 등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연명의료를 중단하려는 주된 이유로 꼽혔다. 하지만 실제로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사망하는 환자의 비중은 이보다 훨씬 낮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서 65세 이상 사망자 중 연명의료를 중단한 이들은 16.7%에 그쳤다.

연명의료 중단 의향이 지켜지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가족들의 반대다. ‘부모가 사망하기 전 의료적으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 ‘연명의료 중단을 받아들이는 건 불효’라는 인식이 환자의 뜻을 거스르게 한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한 보호자의 20.3%는 가족 간 갈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하은진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환자가 사전의향서를 썼더라도 보호자들이 연명의료를 강력하게 원하면 병원이 거부하기 어렵다”고 했다.

연명의료 중단 이후가 두려워 중단 결정을 철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임종기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심리적 안정을 돕는 호스피스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상범 대한재택의료학회 총무이사(신내의원 원장)는 “낮은 호스피스 수가 때문에 주로 공공병원이나 종교적 배경이 있는 의료기관만 완화의료를 제공하고 있다”며 “가정형 호스피스도 많이 부족해 지방일수록 이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 등 임종기에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밝힐 수 없는 환자들은 사전의향서를 썼더라도 가족의 뜻에 따라 연명의료를 지속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찬녕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과 교수는 “치매 특성상 연명의료 중단이 본인의 진짜 뜻인지 불명확해 결국 보호자 뜻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 연명의료 중단 넘어 ‘사전 돌봄 계획’ 세워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환자 본인의 선택이 연명의료 결정에 반영되는 비율은 절반에 못 미친다. 당사자가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19세 이상 성인은 누구나 작성할 수 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거나, 말기 또는 임종기 환자가 주치의와 상의해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밝히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2018년 2월 연명의료 결정 제도 시행 이후 지난달까지 이렇게 본인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는 전체 중단 환자의 44.2%(22만4567명)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국민의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 연명의료 결정 제도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답게 죽을 권리’를 강조하는 선진국에서는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밝히는 수준을 넘어 구체적인 ‘사전 돌봄 계획(ACP·Advance Care Planning)’을 세운다. 미국은 사전의료지시서 ‘다섯 가지 소원(Five Wishes)’ 양식이 널리 활용된다. 통증 완화 등 구체적인 의료 행위, 돌봄 환경, 임종기 정서적 요구 사항은 물론이고 장례 방식까지도 당사자의 뜻을 최대한 반영한다. 영국도 심폐소생술 시행 여부, 병원 이송 등 응급 치료 범위 등을 사전에 정한다.

윤영호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장은 “의료진이 환자의 의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돌봄 계획을 수립하는 제도가 정착돼야 한다”며 “정부가 국민의 죽음의 질을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종한 인하대병원 작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임종기 의료와 돌봄 방식부터 장례 방식까지 본인의 뜻대로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호 기자 number2@donga.com
신예린 기자 yrin@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