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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박원호]그 많던 ‘폴리페서’들은 어디로 갔을까

입력 | 2026-04-27 23:15:00

‘폴리페서방지법’ 後 국회서 사라진 학자들
국회 더 나아졌나? 빈자리는 누가 채우나?
정파-당론정치 완화할 장치 너무 쉽게 포기
아는 것의 무게 아는 지식인 설 자리 어딘가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폴리페서’라는 말은 그 자체로 멸칭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진리를 탐구해야 할 지식인들이 지저분한 정치권에서 이리저리 줄 서는 것을 곱게 봐줄 수는 없다. 그래서 심지어 다음과 같은 ‘폴리페서 방지 조항’도 있다.

2013년 개정된 국회법은 ‘정당의 당원이 될 수 있는 교원’-왜 그냥 ‘대학교수’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의 경우에는 국회의원이 되려면 그 본직을 사임하도록 하고 있다(29조 2항). 국회의원 4년의 임시직을 마치고 나면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든 것이다.

이 칼럼에서 ‘폴리페서’들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교육과 연구를 등한시하고 동료와 학생들의 희생 위에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자들을 욕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내가 거론하고 싶은 것은 2013년 이후에 우리 국회의 역량이 압도적으로 좋아졌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2012년에 출범한 19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여의도에서 대학교수 출신 의원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4년간의 국가에 대한 봉사이건 개인의 영달이건, 이를 위해 평생의 공부와 지도 학생들이 있는 대학을 떠난다는 결심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농담을 조금 섞자면 ‘폴리페서’들의 자리를 정치인들이 가로막고 이를 ‘룸펜 법률가’들이 흡수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법률가들은 언제든지 돌아갈 변호사업이 있고, 당선되건 낙선되건 이름을 알리는 것이 영업에도 유리할 것이다.

최근의 국회가 예전에 비해 입법 역량이나 정책적 전문성이 약화됐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정책보다는 정파가, 내용보다는 당론이 국회의 더 중요한 운용 원리가 된 것임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런 정치 양극화에 대해 문약(文弱)한 교수들이 무슨 소용일까 의심하면서도, 그래도 정책 영역의 전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여야에 있었으면 조금이라도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4년마다 리셋되는 입법부의 제한된 정책 역량이, 행정부 각 부처 관료들의 직업적 전문성을 그래도 조금 따라잡을 유일한 방법을 너무 쉽게 포기했던 것은 아닌가.

사실 대한민국의 정치사는 대학과 지식인 참여의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 헌법의 초석을 마련한 유진오 교수부터 시작해서, 권위주의 정권이건 민주화 이후 정권이건 아카데미아의 지식과 권위를 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강력한 한국 발전주의 국가의 정책적 틀과 아이디어들을 마련했던 것도 대학이었으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가장 핵심적인 비판과 실천들 또한 대학이 적극적으로 제공했다.

동일한 내용을 훨씬 부정적으로 쓸 수도 있겠다. 권위주의 정권의 합리화를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복무’했던 것도 결국 대학교수들이었고, 이러한 ‘어용학자’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야말로 폴리페서들이 가장 비판을 많이 받는 지점이다.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위선과, 조직과 현실을 모르는 끝없는 고집을 생각하면 이들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놀랍다. 지금도 5년마다 선거캠프에는 ‘가정교사’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대학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큰 이야기, 거시적 통찰보다는 ‘20세기 후반 미국의 대외 통상정책’처럼 보다 구체적이고 특화된 전문 영역을 깊이 파는 것이 학문적 성취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공론장에 나서서 국가의 큰 방향을 논하는 일은 대학 안에서조차 점점 낯선 것이 돼 가고 있다. 문제는 폴리페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폴리페서가 없다는 점이며, 어쩌면 그 역할을 제대로 맡을 수 있는 지식인의 토양 자체가 사라져 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썼다는 이유로 나 자신이 폴리페서라 불리게 될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이를 무릅쓰고서라도 여기서 던지고 싶은 질문은 지식과 권력의 긴장이라는 매우 오래되고 근본적인 난제이다. 플라톤이 이상국가에서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질서 정연한 하나의 논리로 무장한 철인군주(국가)에게 그 권위에 도전하는 시인(지식인) 무리들이 퍼뜨리는 여러 색깔의 의견들만큼 큰 위협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정치는 그래서 어떻게 나아질 것인가. 오늘날 한국에서 토론 불가의 빨간색과 파란색 간 전쟁 같은 권위에 누가 도전할 것이며, 누가 제3의 의견을 내고 사람들을 설득할 것인가. 그는 고독한 학자도, 줏대 없는 폴리페서도 아닌, 그러나 자신이 아는 것의 무게를 기꺼이 공론장에 올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설 자리를 우리 정치가 허락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사람을 우리 대학이 길러낼 수 있을까. 추방된 시인들이 돌아오는 길이 생각보다 멀고 험할지도 모를 일이다.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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