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는 자연의 보편적 특성 살아남기 위해 탐지 능력 키워… 현재까지도 ‘진화적 엔진’ 역할 ‘사기꾼 물고기’ 청줄베도라치… 색 바꾸며 다른 어종인 척 위장 ◇자연에서 인간까지 속임수의 진화/리싱 선 지음·김아림 옮김/384쪽·2만2000원·세종서적
책은 자연과 인류가 속임수와 배신, 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통해 진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태평양 일대에 서식하는 청줄베도라치(사진)는 다른 어종인 척 위장함으로써 야생에서 살아남고,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양육을 떠넘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Jenny Hu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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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처럼 황당하고도 신비로운 자연 속 사기꾼들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러면서 동식물과 인간의 속임수가 단지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를 움직여 온 근본적 메커니즘’이란 시각을 제시한다. 동물의 행동과 사회적 신호를 바탕으로 ‘인류의 정직과 기만은 어떻게 공존하면서 진화했는가’를 오랫동안 탐구해 온 미국 센트럴워싱턴대 생물과학부 석좌 연구교수가 썼다.
허세와 무임승차, 거짓 경보 등 우리 일상과 직관적으로 연결해 볼 만한 사례들이 풍부하게 담겼다. 수컷 공작이 “크고 화려하기만 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꽁지깃”을 갖도록 진화한 이유에 대해선 “무일푼 대학생이 BMW 컨버터블을 빌려 데이트 상대를 꼬드기는” 행동에 빗댄다. 가능한 한 빠르게 암컷에게 접근하고자 외형을 과장하는 수컷이 많다. 이에 암컷은 “훌륭한 수컷과 쭉정이를 차분히 구별할 전략으로서 충동성이 훨씬 약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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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꾸만 속고 속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를 다룬 대목에서 책은 빛을 발한다. 저자는 속임수가 역설적으로 인간 사회를 더욱 정교하게 만든 ‘진화적 엔진’이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속임수는 일종의 군비 경쟁을 촉진한다. 속이는 자는 더 정밀한 가짜를, 속지 않으려는 자는 더 예리한 탐지 능력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적당한 때 정직함을 드러내는 것도 전술이다.
이 치열한 창과 방패의 대결 속에서 사기꾼을 가려낼 법률과 윤리, 기술 혁신이 이뤄졌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비단 중근세 시대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저자는 인터넷 시대 이후 해킹과 거짓 정보가 확산됨에 따라 사이버 보안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속임수라는 독(毒)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문명이라는 항체가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