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리지 웨이드 지음·김승욱 옮김/452쪽·3만2000원·김영사
그러나 학술지 ‘사이언스’ 전문 기자인 저자는 이 사건을 단순한 종말이 아닌 변화의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노동력이 급감하자 살아남은 피지배층의 노동력 가치가 높아졌고, 지배층의 통제는 약화됐다. 그 결과 중세 사회의 경직된 위계 구조는 균열을 맞았고, 보다 평등한 질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책은 이처럼 인류가 겪어온 다양한 시대의 ‘아포칼립스’를 최신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복원한다. 저자는 이를 “한 사회의 생활 방식과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집단적 상실”로 정의하며, 파괴 자체보다 그 이후 인간의 적응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극심한 상실 속에서도 기존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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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에 ‘멸망’으로만 간단히 기록됐던 아포칼립스의 순간을 ‘실패’가 아닌 ‘적응과 재편’의 과정으로 해석한 점이 흥미로운 책. 팬데믹과 기후위기, 정치적 불안이 겹친 오늘날 역시 또 다른 전환의 시기일 수 있다. 재난을 단순한 파괴로만 볼 게 아니라 그 이후 어떤 변화가 가능해지는지를 읽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