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묻혔던 침몰의 진실 일본인 기관사 회고록서 증언 “생존자 확인 사살처럼 보였다” 日 정부 생존자에 위로금 지급 “어뢰 음향 탐지해 보고” 내용도
2013년 10월 5일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인근 해상에서 열린 곤론마루 침몰 희생자를 위한 추모 행사에 참여한 유족들이 선박 갑판에서 바다를 향해 헌화하고 있다. 관문해협도선사(関門海峡渡船史) 서적 캡처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서도 관련 연구 논문이 검색되지 않았다. 한글로 된 서적은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81·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이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7월 펴낸 52쪽 분량의 소책자 ‘곤론마루 격침 사건’이 유일했다.
김승 한국해양대 교수(국제해양문제연구소)는 “일제 말기에는 강력한 언론 통제로 신문사조차 강제 폐간돼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며 “곤론마루 침몰은 독립운동도 아닌 군 관련 사건이기에 일제가 정보를 더욱 극비로 관리해 사료 찾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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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지난달 23일 일본 시모노세키 곤론마루 위령비 방문 때 만난 향토사학자 오하마 히로유키 씨(79)가 제공했고, 번역 작업은 1975년부터 1988년까지 일본 교토대와 고베대에서 학위를 취득한 김 소장이 도왔다.
곤론마루 침몰 당시 상황을 증언한 기관사 마쓰바야시 마사오 씨 모습. 관문해협도선사(関門海峡渡船史) 서적 캡처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코르크로 된 사각형 뗏목을 발견해 그 위에 몸을 의지했다. 다른 생존자 7명이 함께 표류하던 중 검은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조선이 맞는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순간 갑자기 불꽃을 튀기며 사격이 시작됐다. 그는 “생존자를 확인하고 사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바닷속에 몸을 던져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다시 뗏목으로 올라온 이들은 서로 말을 걸며 버텼고 13시간 후 한 선박이 나타나 구조될 수 있었다. 구조선에는 다른 생존자 10명이 먼저 구조돼 있었다. 인근 항구로 옮겨져 진료를 받은 이들은 6일 부산으로 이송돼 신체검사와 조사를 받았다. 이어 7일 오전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다시 조사받고 귀가했다.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생존 사실이 통보되지 않아 집에서 이미 장례 준비가 진행 중이었던 것. 이후 한 달 넘게 통원 치료를 받았고, 생존자들에게 위로금 50엔이 지급됐다. 당시 관부연락선 여객 운임은 일등석이 20엔, 이등석이 10엔이었다고 한다. 곤론마루 침몰 후 관부연락선에서 구명조끼 상시 착용이 의무화됐다고 그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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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론마루 침몰 당시 기관사 마쓰바야시 마사오가 표류하며 겪은 상황이 기록돼 있다. 관문해협도선사(関門海峡渡船史) 서적 캡처
그는 자체적으로 계산한 결과 음향 발생 지점이 70km 떨어진 오키노시마 인근 해역으로 추정했는데 그 정도로 먼 곳에서 어뢰 음향이 도달할 리 없을 것으로 여겼다고 회상했다. 김 소장은 “일본 서적들은 정부와 학계 차원의 공신력 있는 연구가 아닌 시모노세키의 향토사학자들의 조사 및 연구 결과를 엮은 것”이라며 “현재 고령으로 이런 연구자마저 거의 숨진 상황인 만큼 더 늦기 전에 생존자와 유족을 찾아 제대로 된 사료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화영 기자 r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