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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날아다니는 평화와 고요의 섬[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6-03-07 01:40:00

싱가포르 센토사섬




싱가포르 여행이라고 하면 마리나베이샌즈호텔 인피니티풀과 머라이언이 떠오른다. 최첨단 마천루를 배경으로 한 화려한 야경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싱가포르는 좁거나 획일적이지 않다. 센토사섬에서는 공작이 우아하게 걸어다니는 고요한 해변과 열대우림이 있고, 도심 뒷골목을 걸으면 다양한 인종과 민족, 종교이 섞여 사는 모습을 만난다. ‘사람 냄새 가득한 로컬 맛집’을 찾아가는 색다른 싱가포르 여행을 떠나 보자.

● 북미정상회담 열린 센토사섬

센토사섬은 싱가포르 본섬에서 남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다. 원래 해적의 본거지여서 말레시아어로 ‘블라깡 마티(등 뒤에서 죽음을 맞는 섬)’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렸다. 영국 식민지 시절엔 영국군이 주둔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일본군 포로수용소가 됐다.

싱가포르 본섬에서 800m 떨어진 센토사섬의 아침. ‘평화와 고요의 섬’이라는 이름답게 해변과 열대우림의 자연환경이 살아 있는 휴양지다.

싱가포르 정부는 1970년대부터 유니버설스튜디오를 비롯한 고급 테마파크와 리조트를 지었고 ‘평화와 고요의 섬’이란 뜻인 센토사로 불렀다. 2018년 6월 12일에는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센토사 카펠라호텔에서 만나 성조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세워 놓고 악수를 나눴다.

카펠라 호텔 회랑 바닥에는 지금도 북미정상회담을 기념하는 황금색 원판이 붙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에 이어 이란을 폭격 중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맞잡은 손이 새겨진 황금색 원판 위에 서 있으니 앞으로 세계 정세와 한반도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기만 하다.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던 광둥식 파인다이닝 중식당 카시아(Cassia)에서 두 사람이 공동성명에 서명한 길이 4.3m 티크 원목 테이블은 현재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싱가포르 센토사섬은 영국군 기지에서 일본군 포로수용수로, 그리고 21세기 들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던 센토사섬 카펠라호텔에서 바라본 숲과 바다.

카펠라 호텔은 원래 19세기 영국 포병 장교들과 가족들이 살았던 2층짜리 숙소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는 하얀색 빅토리아식 건축물에 곡선으로 된 붉은색 건축물을 새로 이어 붙였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피아마(Fiamma)의 아침 뷔페에서는 싱가포르식 국수 락사(Laksa)를 맛볼 수 있고, 카시아에서는 파인다이닝 코스 요리가 특선이다.

센토사섬은 싱가포르에서 자연환경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섬이다. 여행객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공작과의 만남’이다. 공작은 리조트를 당당하게 활보하고 해변 풀숲에서 우아하게 산책한다. 세계 어떤 곳에서도 이렇게 많은 공작을 만나기란 어렵다(사진).

공작이 높은 나무나 건물 지붕 위까지 날아다니는 모습도 처음 봤다. ‘화려한 깃털을 펼친 공작이 어떻게 날 수 있지?’ 생각하는 순간, 공작이 닭처럼 옆구리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공작은 화려한 부채꽃 깃털 대신 허리 쪽 짧은 날개를 강하게 휘둘러 몸을 빠르게 띄워 올렸다.

● 종교와 문화의 용광로


센토사섬에서 나와 지하철(MRT)을 타고 싱가포르 도심 뒷골목 여행에 나섰다. 별도의 교통카드 없이도 한국에서 가져온 신용카드를 개찰구에 대니 곧바로 탑승이 가능했다. 정말 편리했다. 내린 곳은 리틀인디아역. 목걸이에 신분증을 걸고 있는 가이드를 만났다. 중국인 아버지와 말레이시아계 무슬림 어머니를 둔 그녀는 “이 구역에서 내 이름은 엔젤(Angel)로 통한다”고 말했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에 모두 친숙한 그녀 이름이 기독교의 엔젤이라니….

시장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건 형형색색의 꽃가게였다. 자스민, 마리골드, 그리고 연꽃까지…. 얼마나 꽃이 싱싱한지 화환마다 벌들이 날아와 꿀을 빨아먹고 있었다. “이 꽃들은 신들에게 바치기 위한 꽃이예요.”

리틀인디아 구역 세랑군로드에 있는 스리비야 칼리암만 힌두 사원. 신들의 얼굴로 장식된 웅장한 탑(고푸람)이 인상적이다.

엔젤은 비닐봉지 한가득 꽃을 샀다. 그리고 향한 곳은 신들의 얼굴로 장식한 웅장한 탑(고푸람)이 있는 스라비야 킬리암만 사원. 리틀인디아 심장부에 자리한 힌두 사원이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향냄새와 꽃향기, 그리고 기도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갑자기 남인도 타밀나두 뒷골목으로 이동해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차이나타운 지하철역에 내리면 비첸향 육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후각을 자극한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빅토리아 양식의 숍하우스(Shophouse) 창문에는 파스텔톤 알록달록한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앞은 가게이고 뒷편은 주거지인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2층 스타벅스에서 보라색 창문을 열고 보니 골목길 상점마다 춘절을 축하하는 홍등이 가득 걸려 있었다.

차이나타운 한가운데는 당나라 양식으로 지은 불아사(佛牙寺) 기와지붕이 우뚝 솟아 있다. 석가모니 치아를 보관하고 있다고 해서 ‘부처님 어금니 사원(Buddha Tooth Relic Temple)’이다. 사원은 해질녘 야경이 시작되면 황금빛으로 물든다.

부기스(Bugis) 지역으로 불리는 아랍 스트리트에 가면 황금색 돔과 화려한 아라베스크 스타일의 술탄 모스크가 있다. 모스크 맞은편 골목 하지 레인(Haji Lane)은 인생샷 천국이다. 바로크식 건물들은 감성적인 카페와 부티크, 향수점, 공예품 가게들로 꽉 차 있다.

텔록 아이어 골목에는 한식당도 많다. 한국인 셰프 루이즈 한(한석현)이 이끄는 레스토랑 내음(NAE:UM)은 한식 파인다이닝으로 현지 미식가들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싱가포르 역사는 1819년 영국 스탠포드 래플즈 경(卿)이 항구로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말라카 해협에 있는 이 섬은 동서양 교역로가 되었다. 부산광역시 넓이보다 작은 불과 730㎢의 작은 섬에 중국, 말레이, 인도, 아랍, 유럽 등에서 온 611만 명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인상적인 점은 그 다양성이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로컬 맛집 호커센터


오전 6시, 싱가포르 주택가에서는 밥 짓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대신 거리 호커(Hawker)센터 키친에서 팬을 부딪치는 소리와 고기를 구우며 피어오르는 연기가 도시를 깨운다. 호커는 행상인이란 뜻이다. 싱가포르 이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길거리 어디든 임시로 만든 노점에서 밥을 짓고, 국수를 삶고, 카레를 끓였다.

1965년 싱가포르 독립 후 리콴유 총리는 노점상을 없애는 대신 한 곳에 모으는 것을 선택했다. 개방형 건축물 안에 수십 개의 노점을 배치하고 중앙 로비에 공용 식탁 공간을 만들었다. 위생 관리, 도시계획, 주민 복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도시공학적 솔루션이었다. 한화 4000∼6000원으로 한끼를 해결할 수 있어 하루 세끼 모두 외식하는 사람도 많다.

싱가포르 전역에 120개 이상의 호커센터가 있다. 한 센터엔 80개 이상의 노점이 빼곡하다.지역에 따라 사는 인종과 문화가 다르고 음식도 다르다. 리틀 인디아 테카센터(Tekka Center)에서는 ‘향신료의 교향곡’이 펼쳐진다. 커민, 코리앤더, 카다몬, 클로브 등의 향이 한데 섞여 공중을 떠돈다.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대부분 인도 요리다. 비리야니(쌀밥), 로티 프라타, 라자(렌즈콩 카레), 탄두리 치킨, 도사(쌀가루 팬케이크), 파파담(렌즈콩 튀김 스낵)…. 엔젤은 “오늘 비리야니가 당기면 비리야니, 내일 아침엔 난(Naan), 저녁엔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프라타 한 장을 먹는다”고 말했다.

테이블 간격은 좁다. 낯선 사람과 합석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인 옆에 인도인이 앉고 그 옆에 말레이인이 앉아 각각 다른 음식을 먹는다. 할랄과 비(非)할랄 음식을 담은 쟁반은 색깔로 엄격히 구분한다. 인종과 종교를 초월해 한 테이블에서 먹는 호커센터 문화는 2020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호커센터 노점상 중에는 미슐랭가이드 별을 받은 맛집도 수두룩하다. 2016년 차이나타운 호커 찬(Hawker Chan)이 처음이었다. 30년 이상 호커센터에서 일해 온 호커찬의 간장치킨 요리는 소박하고 직관적이다. 닭을 삶아 식힌 다음 자신의 비법 간장 소스에 담근다. 그의 메뉴는 여전히 한끼에 4∼5싱가포르달러(약 4000∼5000원). 미슐랭 스타를 받았어도 가격을 올리지 않겠다는 약속. 그것이 호커센터 정신이다.

차이나타운 미슐랭 맛집 The 1950s Coffee(五十年代)에서 할아버지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차이나타운 호커센터의 ‘The 1950s Coffee(五十年代·오십년대)’도 미슐랭 맛집이다. 할아버지 바리스타 혼자 동남아 전통 코피(Kopi)를 내리고, 돈을 받고, 서빙을 한다. 가격은 1.3싱가포르달러(약 1500원). 진한데 벨벳처럼 부드럽고 향기도 좋다.

할아버지 바리스타가 인도네시아 로부스타 원두를 버터와 설탕으로 함께 볶아 캐러멜 코팅을 입힌 다음, 필터로 우려낸 진액을 공중에서 에어레이션(공기와 접촉시키기)하고 연유를 더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글·사진 싱가포르=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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