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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이기에 앞서 일생이 펼쳐졌던 시공간… 일상의례가 머물던 ‘집’[김대균의 건축의 미래]

입력 | 2026-03-04 23:09:00

‘命’은 목숨이자 명령이라는 뜻… 인간의 ‘명’은 부여받은 시공간
과거 집에서 출생-관혼상제 치러… 한 가족 생애 담아낸 우주인 셈
삶과 죽음, 희로애락 함께하는 곳… 집 의미 되살리는 게 존재의 소명



우리는 과거 집에서 태어나고, 결혼하고, 생을 마치고, 제사를 치렀다. 1910년대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간직한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장호혜당기념관’. 사진 출처 김동규 작가


《‘우주(宇宙)’로서의 집


‘명(命)’은 ‘목숨’이라는 뜻도 있지만 ‘명령’이라는 뜻도 있다. 생명, 수명, 운명, 소명 등 인간의 일생과 관련된 단어에는 ‘명’을 두루 쓰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목숨과 명령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 봤다. 그에 따르면 시대나 국가, 부모도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세상에 내던져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 선택할 자유를 부여받았고, 그 주체적인 결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반면 동양에서는 생명을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나오면서 하늘에서 부여받은 명령에 충실히 응답해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 운명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매일 변화하는 ‘운’과 자신이 태어난 날을 뜻하는 ‘명’이 결합된 단어다. 명리학에서 ‘명’은 태어난 날이자 부여받은 능력이며, 그 능력으로 하늘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자 ‘命’은 집에서 사람이 무릎을 꿇고 누군가의 말을 듣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다. 우주는 ‘집 우(宇)’와 ‘집 주(宙)’가 결합된 단어다. 우주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문헌은 시교(기원전 390년∼기원전 330년)가 쓴 ‘시자’다. 이 책에서 상하와 동서남북 사방, 즉 공간을 우(宇)로 설명하고,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주(宙)로 정의했다. 즉, 우주는 집이자 시공간이다. ‘명’은 우주라는 집에서 각자의 생명과 말씀을 동시에 부여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명’받은 것일까? 누군가만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세상은 참 불공평할 것이다. 하지만 태어난 존재라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을 뜻하는 생명을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부여받은 것은 시간이다. 또한 우주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공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공간을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살아 있는 동안 주어진 시공간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명’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공개적인 빈소를 마련하고 지인들에게 장례식 일정과 장소를 알리는 부고를 보내는 대신 가족과 가까운 일부 사람들만 함께하는 작은 장례식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결혼식 역시 식장에서 시간에 쫓겨 치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가족과 지인만 함께하는 작은 결혼식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경제적 이유도 있겠지만,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번잡함 없이 온전히 가족과 가까운 이들과 함께하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생의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기념할 최적의 장소는 어디일까? 어려운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역사를 거슬러 생각해 보면 살던 집과 마을이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집에서 태어나고, 집에서 결혼하고, 집에서 죽고, 집에서 제사를 치렀다.

집은 나와 가족의 삶을 온전하게 담는 영화와 같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 다시 늙고 결국에는 죽듯이, 집도 태어나고 자라며 언젠가는 죽는다.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집 전체가 아이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아이가 자라 분가를 하면 집은 또다시 새로움을 맞이한다. 오늘날 집을 자산적 가치와 기능적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가족이 함께하는 공간으로서 집의 서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이 든다.

내가 태어나고 결혼하고 죽을 장소가 집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집은 특별해진다. 우리에게 집은 우주이자 나의 시공간이다. 관혼상제는 단순히 그 집만의 행사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행사였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이웃이 있던 과거의 삶과 비교하면, 옆집에 누가 돌아가셔도 전혀 알 수 없는 지금 우리의 삶은 참으로 생기가 없어 보인다.

몇 년 전 대안학교가 있는 지방의 한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마을의 미래 구심점에 대해 강의한 뒤 주민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이때 마을의 구심점으로 제안한 것이 관혼상제의 집이다. 이 기획은 각 가정의 관혼상제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고, 평소에는 마을의 쉼터가 되는 장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또한 그 마을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결혼이나 장례를 해 함께 보듬는 마을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쇼팽, 들라크루아, 오스카 와일드, 이사도라 덩컨,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 등이 묻혀 있으며 도시공원의 역할도 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결혼식과 장례식을 어떻게 한 공간에서 치를 수 있을까? 의아해할 수 있지만, 성당은 결혼식과 장례식이 모두 열리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성당의 지하에는 묘가 있는 경우도 많다. 또한 유럽의 오래된 묘지는 지역의 공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공원묘지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기에 일상생활에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다.

누군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에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여러 이유로 고향에 살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결혼하고 죽는다면 그 장소는 매우 특별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귀’라는, 고향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일은 작은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생명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주어진 시공간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명이자 소명이며, 곧 생명이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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