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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끝을 지킨 이는 각성한 민초?… 실제 역사는 아전의 결단[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6-03-01 23:00:00

〈114〉 왕과 사는 이의 정체




‘아전’은 조선시대 중앙·지방관청에서 일하던 하급 관리로, 중인 계층에 속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민초로 묘사된 엄흥도(유해진 분·왼쪽)는 실제로는 아전이었다. 사진 출처 쇼박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숙부 세조가 조카 단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좌를 차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단종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유명하다.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반복돼 온 이 유명한 이야기를 또 한 번 해도 될까. 해도 된다. 다른 관점을 취하기만 한다면. 어떤 사태든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느냐, 혹은 누구의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니까.

단종의 마음에 이입하고 싶은 사람은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읽으면 된다. ‘단종애사’는 단종의 슬픈 마음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의 충정을 드높이고 수양대군(세조)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상대적으로 비판한다. 이 관점에 서면 ‘애사’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단종 사태는 원통한 비극이 된다. 세조의 마음에 이입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김동인의 ‘대수양’을 읽으면 된다. ‘대수양’은 단종과 사육신을 미화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도덕을 초월하는 수양대군의 영웅적 결단에 초점을 맞춘다. 이 관점에 서면 ‘대(수양)’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단종 사태는 유능한 경세가가 그에 걸맞은 권력을 쥐는 정치적 드라마가 된다.

그런데 올겨울 최대의 흥행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세조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고, 부재가 존재보다 더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에서 세조의 부재야말로 그렇다. 이 영화는 애써 세조의 존재를 지우고, 그렇게 생겨난 공백을 한명회라는 양반으로 메운다. 그러니 ‘단종애사’와 달리 이 영화에서 세조의 야욕을 위한 공간은 없다. ‘대수양’과 달리 이 영화에서 세조의 영웅적 행보를 위한 공간 역시 없다. 이 영화는 그동안 세조에게 할애됐던 시공간을 궁중정치와 무관한 민초들에게 부여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의 시각에서 단종 사태를 바라보면 어떨까. 입에 풀칠하는 게 최대 관심사인 민초라면 권력의 정통성이나 도덕성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자신과 주변 사람이 조금이라도 덜 굶고 덜 헐벗는 데 관심이 있을 것이다. 살림살이를 조금이라도 낫게 해주는 사람이 왕이 되기를 바랄 뿐, 왕의 교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영화 제목이 말하는 ‘왕과 사는 남자’가 바로 그러한 민초다. 영화 전반부는 그러한 민초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공들여 보여준다.

주인공 엄흥도는 명색이 촌장이지만 전형적인 민초로 그려진다. 유력 양반이 자기 마을에 유배 와서 이른바 떡고물이 떨어지기를 바란다. 유배자가 유배 기간 동안 동네 아이들에게 글이라도 가르쳐 주기를, 서울로 돌아가면 옛 유배지를 위해 온정을 베풀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던 인물이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무시무시한 정권의 압력에 맞서 불쌍한 단종을 도우려는 도덕적 결단을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왕과 사는 남자’ 속 최대 드라마는 세조와 단종의 대결도 아니요, 한명회와 단종의 대결도 아니요, 금성대군(세조 동생)의 ‘역모’ 실패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상식이 되어 큰 울림을 주지 않는다. ‘왕과 사는 남자’가 추진하는 드라마는 민초 엄흥도의 변화다.

신윤복 ‘주사거배’. 18세기 후반 주막의 풍경으로 제일 오른쪽이 의금부 아전인 나장(羅將·점선 안)이다. 까치등거리에 깔때기를 쓴 기세 좋은 모습이다. 사진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실리에 급급했던 인물이 어떻게 이 같은 도덕적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물론 먹고사는 일에만 연연했던 인물이 인생의 전기를 맞아 도덕에 눈뜨는 일이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엄흥도의 변화는 그 이상이다. 단순히 단종을 불쌍히 여기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당대 최고 정치권력을 거역할 정도의 도덕적 영웅이 된다. 이것은 무리한 전개가 아닌가. 아무리 단종이 불쌍하기로서니, 어떻게 일개 민초가 자신과 가족,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을의 위험을 감수하고 몰락한 단종 편을 들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감독이나 각본가는 항변할 수 있다. 그러한 드라마 전개는 사료에 근거한 것이라고, 따라서 있을 법한 일이라고. 실제로 영화는 말미에 엄흥도가 실존 인물임을 역설한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말라는 경고에 엄흥도는 정면으로 맞선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단종의 장례를 지내는 엄흥도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누군가 경고하자, 엄흥도는 의연하게 대꾸한다.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달게 여기는 바다(爲善被禍, 吾所甘心).” 물론 이러한 사료가 얼마나 실제 상황을 핍진하게 전하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각본가는 이를 근거로 해서 엄흥도의 행동이 개연성이 있다고 볼 만하다.

그런데 유의할 점이 있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겠지만, 그는 이른바 민초가 아니라 영월 지역 아전이었다. 아전은 지배층 양반과 피지배층 민초 사이에 낀 애매한 존재다. 여기에 이 영화의 고민이 있다. 그간 주로 밉상으로 묘사돼 온 아전보다는 불쌍한 민초들을 불러와야 많은 관객이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 그래서 아전 엄흥도를 애써 민초 엄흥도로 바꾼 것이 아닐까. 그 때문일까,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엄흥도의 도덕적 각성은 쉽게 설명할 수 없게 됐다.

이 영화가 아전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했다면 한층 더 흥미로운 영화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실로 조선시대에 아전만큼 흥미로운 존재도 드물다. 양반들은 습관적으로 아전들을 도덕보다 실리를 앞세우는 무리들이라고 경멸했지만, 양반들은 아전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어느 사회든 ‘기능성 잡일’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잡일은 본인이 하기 싫으면 외주를 줘야 한다. 잡일을 해주는 아전이 존재함으로써 양반은 예의를 지키고 고담준론을 할 수 있었다. 엄흥도가 아전이었다면 단종의 최후는 아전이 중앙 권력자들보다 더 도덕적인 존재임을 선포할 기회였던 셈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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