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 뉴욕 속 이야기로 떠나는 짧은 여행.
기사에 담지 못한 뉴욕의 순간을 전해드립니다.
기사에 담지 못한 뉴욕의 순간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여러분은 설날 소원으로 무엇을 바라셨나요. 아마도 빠질 수 없는 게 소중한 사람들의 ‘건강’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건강과 관련한 미국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아마도 들으시다 보면 속으로 ‘대한민국 만만세’를 외치며 상대적 만족감(?)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국에 있다보면 한국의 많은 것들이 그립지만, 미국에서 특히나 아쉬운 것은 한국의 ‘병원’입니다. 한국에 살 때는 당연하게 생각, 아니 어쩌면 공기처럼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사실은 엄청난 것이었음을 수시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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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과 동시에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듯 착착 진행되는 건강검진도 대한민국에서는 보편적 서비스가 된 지 오래입니다.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하루나 이틀 만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신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검진받을 수 있죠.
하지만 이 모든 건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우수한 의료체계와 건강보험 시스템 덕분이었음을 병원에 가는 순간마다 깨닫게 되는 게 바로 이곳 미국, 특히 뉴욕입니다.
왜 그런지는 몇 장의 영수증만 봐도 아실 수 있습니다.
‘350달러의 순간’. 맨해튼의 평범한 개인 병원에서 보험 적용 없이 감기 진료 초진시 청구 비용이다.
‘200달러의 순간’. 맨해튼의 평범한 개인 병원에서 보험 적용 없이 감기 진료 재진시 청구 비용이다.
‘600달러의 순간’. 맨해튼의 개인 치과에서 보험적용 없이 어린이 치아 두개를 발치할 때의 가격이다. (심지어 의사 선생님이 재량으로 할인해 준 뒤 가격이며, 성인 치아 발치는 더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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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달러의 순간’. 동네 소아과에서 간단한 신체검사(키재기, 몸무게 재기, 청력검사 등)에 대해 책정된 가격이다.
처음 뉴욕에서 병원에 갔던 날 비용을 결제하며 제 눈을 의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감기 진료를 보러와서 50만 원을 내고 있는 것이 실화인가.’
뉴욕에 오기 직전 워싱턴 DC 인근에 산 적이 있는데 그때는 보통 감기 진료 비용이 100달러~150달러 선이었습니다(DC도 엄연히 수도입니다). 하지만 뉴욕은 다른 모든 물가가 그렇듯 병원비 역시 적게는 2배에서 많게는 3, 4배 높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눈이 아파 안과를 찾는데 같은 진료에 대해 저렴한(?) 병원은 350달러를 요구한 반면, 다른 병원은 ‘600달러+α’일 수 있다고 안내했습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병원마다 제각각인 가격 비교(?)를 위해 사전 전화를 돌리고 있는 상황이 더 서글프더군요.
뉴욕의 한 약국 풍경. 일반적으로 진료 후 의사가 전산을 통해 환자의 집 근처나 선호하는 곳 근처 약국으로 처방전을 보내면, 환자는 해당 약국에 가서 이름을 말하고 자신의 약을 찾는 구조다. 종종 의사가 처방전을 잘못 쓰거나, 해당 약국에 지정한 약이 없어 병원에 수정을 요청하거나 ‘약국 뺑뺑이’를 돌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무슨 병원을 가든 30만~50만 원 정도의 비용에 익숙해졌을 무렵, 저를 놀라게 한 사건이 또 한 번 있었는데 바로 약국에서였습니다.
그날은 두드러기 때문에 피부과를 갔는데 초진료가 250달러 밖에(!) 안해서 제 자신을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잘했어. 오늘 착한 병원을 잘 찾았어’ 하면서요.
그런데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더니 약사가 스테로이드 연고를 주며 말하는 가격이 175달러(25만2000원)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래졌더니 약사도 좀 놀랐던지 ‘그럼 좀 적은 용량으로 줄까’하고 묻더군요. ‘응. 제발 최소 용량을 찾아주겠니’했더니 한참을 뒤적인 끝에 50달러짜리 작은 연고를 줘서 들고 왔습니다. 그날도 ‘마음 편히 아플 수 있는’ 한국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약이라도 주는 날은 다행입니다.
언젠가 감기 몸살이 심해 병원에 간 날은 아무 조치나 처방도 받지 못했는데 코로나19와 독감 검사에서 둘 다 아무것도 나온 게 없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항생제 사용에 무척 엄격해서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아무 약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뜻한 물 많이 마시고 열나면 진통제 먹어라’라는 (30만 원 짜리) 실망스런 조언을 듣고 나온 뒤 그 뒤로는 웬만하면 감기로는 병원에 가지 않게 됐습니다.
(이로 인한 유일한 장점이라면 덕분에 1년 넘게 항생제를 먹지 않았다는 건데, 생각해 보면 쉽게 항생제 처방을 받던 한국에서는 거의 없던 일입니다. 얼마 전 보스턴에서 만난 한 슈퍼박테리아 연구자는 “미국의 대학병원 시료에서는 슈퍼박테리아를 1년에 1, 2번 볼 수 있는데 한국 대학병원에서 가져오는 시료에서는 2주에 1번 꼴로 본다”고 하시더군요. 아마도 이런 의료환경이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 병원 얘기로 돌아가자면 전 한국에서 가입한, 일부 진료비를 커버해 주는 보험이 있어 미국에서 따로 보험을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제가 병원에 갈 때마다 내는 금액은 미국에서 건강보험이 없는 뉴요커들이 내는 가격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불안하게 건강보험 없이 사는 사람이 있겠어?’ 싶겠지만 실제 전체 미국인 10명 중 1명은 아무런 건강보험 없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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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계층이 아닌 보통의 경우에 만약 직장에 다니고 있다면 직장이 고용조건의 일부로 이 민간 건강보험료를 일부 부담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좋은 직장일수록 회사 부담률이 높아지는데, 소규모 사업체처럼 낮은 경우에는 50~60%, 돈이 많은 빅테크들처럼 아주 높은 경우 100%까지 회사가 부담해줍니다. (평균적으로는 70~80%대를 지원합니다) 만약 직장이 없거나 직장이 있어도 영세 사업자인 경우에는 개인이 따로 100% 부담을 지고 가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보험료라는 게 어마어마합니다. 미국의 건강보험료는 보험회사별로, 또 상품별로 금액이 천차만별인데 4인 가족 기준 싸게는 연 3000만 원 대부터 극단적인 고가의 경우 연 비용이 1억 원을 넘나들 정도로 한국과 비교하면 정말 엄청나게 비쌉니다. 뉴욕 기준에서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 괜찮은 커버를 받는다’ 하는 상품은 보통 연 4000만~5000만 원대인데, 직장에서 80%를 부담해 준다고 하더라도 매달 본인이 100만 원 가량을 건강보험료로 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당한 재력이 있거나, 괜찮은 직장이 있거나, 확실한 취약계층이 아닌 애매한(?) 국민들은 건강보험 가입이 부담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취약계층의 혜택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직장이 없는 사람들, 직장 소득이 높지도 않지만 낮지도 않은 사람들, 영세 자영업자, 영세사업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젊은이들 등이 비용 부담에 건강보험 가입을 안 하게 되는 것이죠.
이들은 많은 경우 ‘설마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을 위안 삼아 절약하는 쪽을 선택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큰 일이 생기게 되면 거의 파산에 가까운 상태를 맞게 됩니다. 감기 진료에 수십 만 원이 드는 게 문제가 아니고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리면 치료비가 수십 억 원에 달하는 상황을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2014년 시행된 게 바로 최근 미국의 뜨거운 감자인 ‘오바마 케어’입니다. 미국의 건강보험 시스템이 워낙 별로여서 비용도 너무 비싸고 미가입자 인원도 많으니 정부가 소득에 따라 보조금을 줘서 제대로 된 민간 건강보험 가입을 더 많이 하도록 지원해주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죠. 실제 오바마 케어 도입 뒤 건강보험 미가입자 비율이 그나마 줄어들어서 10명 중 1명 꼴이 된 것이고, 도입 이전에는 10명 중 2명이 미가입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가 팬데믹 시기에 확대한 오바마 케어 일부 보조금을 없애겠다고 하면서 미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케어가 비효율적이고 사기가 만연한 낭비적 정책이라면서 이를 바꾸겠다고 했는데, 실제 이 보조금이 축소되면 상당수 미국 중산층의 보험료가 폭등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은 절대 안 된다며 반대를 했죠. 이 때문에 미국 예산안이 가결되질 못했고, 이에 미국 정부는 무려 43일간 정부 기능이 올스톱되며 미국 역사상 최장 셧다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당시 양당은 ‘오바마 케어 문제는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며 일단 연방정부를 다시 가동하는 데 합의했는데 민주당이 한발 물러난 꼴이 되면서 결국 오바마 케어의 일부 보조금이 올해 1월 1일부로 만료됐습니다. 이로 인해 올 들어 미국 내 약 수백만 명의 보험료가 평균 두 배 가까이 올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고, 이 때문에 건강보험 갱신을 포기한 국민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도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보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비싼데도 아플 때 환자 본인 부담액이 상당합니다. 만약 이런 자기 부담 비율이 싫다면? 더 비싼 보험을 가입해야 합니다.
더 황당한 건 이렇게 보험을 들어 놓고도 온갖 이유로 수백, 수천만 원의 치료비를 청구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병원마다, 또 의사마다 커버되는 보험사가 다 다릅니다. 예컨대 A라는 보험사에 가입했을 때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병원과 의사가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외의 병원이나 의사에게 가면 보험에 가입한 게 사실상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보통 보험에 가입한 뒤 내가 가도 되는 병원이 어디인지를 꼼꼼하게 따져보고 가는 게 기본인데, 제 지인은 몇 년 전 이렇게 하고도 수천만 원의 병원비 폭탄을 맞았습니다. 보험 적용이 되는 병원에서, 보험 적용이 되는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응급 수술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수술을 담당한 의사가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의사였다는 이유로 이런 상황을 맞은 것이죠. 이런 경우 환자들은 병원 및 보험사와 또 다시 싸워야 합니다. 이런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몇 년 전부터는 이를 막는 법이 생겼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국 국민들은 아파서 생기는 스트레스 못지않게, 보험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가 큰 상황입니다.
이런 건강보험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분노가 응축돼 한꺼번에 터진 사건이 바로 1년여 전 뉴욕과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루이지 만조니 사건’입니다. 2024년 12월 뉴욕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는데,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힐튼호텔 앞에서 그것도 이른 아침에, 미국 최대 건강보험사인 유나이티드 헬스케어 CEO가 총에 맞아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총의 탄피에는 ‘지연, 거부, 증언(Delay, Deny, Depose)’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서 치료비 지급을 늦추고 거절하며 환자를 담보로 최대 수익을 추구하는 건강보험사에 대한 분노로 촉발된 사건이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잡고 보니 범인은 루이지 만조니라는 이름의 26살 아이비리그 출신 금수저 집안 청년이었는데, 심각한 척추 질환으로 수술과 만성 통증을 겪는 과정에서 보험사에 대한 분노가 커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법정에 출석한 루이지 만조니. 게티 이미지
현재 만조니는 얼마 전 미국에 붙잡혀 온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함께 뉴욕 브루클린의 브루클린 연방 구치소(MDC)에 수감돼 있는데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교도소로 팬레터가 너무 많이 쏟아지다 보니 교정국 업무에 과부하가 걸려서 ‘제발 5장 이하로 보내라’는 지침까지 나왔단 얘기도 들립니다. 지난달에는 웬 청년이 만조니를 탈옥시키겠다며 피자 칼을 들고 교도소로 들어가려다 잡혀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대부분의 미국 국민들은 한국과 같은 의료 시스템을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몇 날 며칠에 걸쳐 돌아다닐 필요 없이, 반나절이면 한 곳에서 내 몸 구석구석을 한 번에 검진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워 하니까요. 제대로 알려만 진다면 이를 경험하기 위해 줄을 설 뉴요커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왕복 비행기 값에 각종 여행비를 더하더라도 한국 의료의 가성비는 뉴욕과 비교 불가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단, 이들을 지원할 체계적 시스템은 뒷받침돼야 하겠죠.
아플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뉴욕의 ‘350달러의 순간’, ‘600달러의 순간’, ‘200달러의 순간’ 등을 볼 때마다 미국의 연방정부 셧다운도, 뉴욕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도 결국은 모두 다 이 한 순간에 담겨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지만 실상 어느 누구도 평등하지 못한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그래도 대부분의 국민이 일상적인 질병을 두려움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한국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올해는 모든 분들이 아픈 곳 없이 건강한 한 해가 되길 바라며 뉴욕의 순간을 마무리합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