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상 며느리 노동 지친 아내 장거리 운전-눈치 불편한 남편 설-추석에 각자 자기 집 가기도 일본은 이미 ‘각자 귀성’ 당연시
지난해 10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서울 서초구 경부고속도로 잠원IC 부산방향이 귀성길을 떠나는 차량으로 정체된 모습. 뉴스1
광고 로드중
서울에 사는 회사원 이모 씨(34)는 이번 설을 앞두고 “명절에서 완전히 해방됐다”고 말했다. 짧은 연휴 동안 양가를 오가느라 늘 빠듯했던 명절 일정에서 벗어나 올해는 남편(35)과 각자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 장거리 이동에 지친 남편이 이를 먼저 제안했고, 시아버지가 지난해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점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 씨의 남편은 연휴 막바지에 부모가 사는 경북 포항으로 내려가고, 이 씨는 연휴 내내 대전에 있는 친정에 머물 예정이다. 그는 “연초에 시어머니 생신으로 포항을 이미 다녀와 괜찮다”며 “결혼 4년 만에 미혼 시절 자유를 되찾은 기분이다. 편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 “명절? 각자 자기 집으로” 부부 점점 늘어
광고 로드중
그간 명절은 며느리들에게 ‘노동의 날’로 여겨져 왔다. 전날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한 뒤 당일에도 차례상과 설거지까지 도맡다 보면 ‘파김치’가 된 상태로 친정에 도착한다. 남편들 역시 장시간 운전 뒤에도 부모와 아내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 편할 틈이 없었다.
이 같은 명절 일과에 지친 부부들 사이에서 ‘각자 명절’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나타나고있는 것이다. ‘차례상’을 없애는 집이 늘어난 것도 이를 가능케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일부선 “그럴거면 굳이 왜 결혼을” 비판도
지난해 10월 3일 오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열차를 이용해 귀성길에 오르고 있다. 동아일보DB
‘각자 명절’을 택한 사연은 다양하다. 결혼 3년차 최모 씨(31)는 올해부터 남편과 명절을 따로 보낸다. 양가 모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그는 “설에는 시가와, 추석에는 친정과 여행을 다녔지만 결국 나는 시부모와의 여행이 불편하고 남편도 우리 부모와의 여행이 편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차라리 각자 부모를 모시고 여행을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광고 로드중
반면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커뮤니티 등에선 “부부가 명절을 각자 보내면 결혼한 의미가 있나” “다른 날은 몰라도 명절에는 함께 찾아뵙는 게 자식된 도리” 등의 지적이 이어졌다.
예비신랑 김 씨(33)는 “여자친구가 어버이날과 생신, 가족 행사 등 함께 찾아뵙는 날이 많은데 굳이 복잡한 명절까지 같이 이동해야 하냐면서 명절 때는 각자 집에 가는 게 어떠냐고 묻더라”며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마음에도 안 들고 이해도 안 된다”고 했다. 특히 부모 세대에선 이를 곱게 바라볼 리 없다. 외아들을 둔 정 씨(64)는 “부부가 각자 집에 간다는 걸 우리 나이대 어느 누가 흔쾌히 ‘오케이’하겠나”라며 “좋게 보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 일본은 ‘각자 귀성’ 당연시
직장인에게 명절 연휴는 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각자 귀성’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세퍼레이트(분리) 귀성’이라고 부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해 11월 5~11일, 20대 이상 남녀 12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0명 중 6명이 ‘각자 귀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응답자의 63.5%는 각자 귀성을 택한 이유로 ‘배우자 가족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쉬고 싶어서’를 꼽았다. 전체 응답자의 72.4%가 ‘(각자 귀성에) 만족한다’고 답했으며, 여성의 만족도는 무려 92.3%에 달했다.
광고 로드중
우리나라에서는 명절 전후로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 상담 증가로 바빠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일각에서는 명절만이라도 각자 부모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문화가 확산된다면 가족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족의 붕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가족 붕괴나 효심이 무너졌다는 징후는 잘 보이지 않고 가족 관계나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분위기로 보여진다”며 “전통의 가치가 과거보다 많이 약화되는 측면이 있고, 젊은 세대에게 실용주의가 억눌리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유연한 형태의 명절을 보내는 풍속도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혜선 기자 hs87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