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깨어진 철판을 불 위에 놓고 콩을 까 넣었다. 바짝 마른 나무는 연기 한 줄기 내지 않고 잘 탔다. 그 나무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꼽추네 마루로 깔려 있었던 것이다.”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단편) 중‘잡초의 씨앗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저물녘, 나무 타는 냄새와 콩 익는 냄새는 어릴 적 한때로 데려간다. 할머니 집에선 콩을 줄기째 꺾어 아궁이에서 까맣게 태워 까먹었다. 콩을 한입 가득 우물거리던 기억을 더듬다 마주한 문장 앞에서 쉬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눈앞에서 집이 무너져도 울지 않는 꼽추의 가족과 인정사정없이 들이닥치는 용역들. 평온한 저녁 냄새와 한 페이지에 놓이면서 비극은 개인의 몫을 넘어서게 된다.
책이 나온 지 약 반세기, 고통받던 난장이는 사라졌을까. 더 정교한 방식으로 서로를 재고 나누고 줄 세우는 건 아닐까. 그래서 너도나도 저마다의 릴리푸트읍을 찾아 헤매는 건 아닐까. 알려졌듯 릴리푸트읍은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이다. 걸리버는 대인국에서 잡아먹힐 위기에 처해서야 깨닫는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저 거대한 괴물 또한 소인으로 보이는 나라가 있지 않겠는가. 소설 속 등장인물 신애의 말마따나 우리는 모두 난장이다.
신춘의 달뜸이 사그라들 무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시인들이 가장 사랑한 소설이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듣고 다시 봐야지 했었다. 주문하기 전 책장을 훑다 귀퉁이에서 삼십 년도 넘은 책을 발견했다. 맨 뒷장의 인주만 세월이 비켜갔는지 유난히 붉었다. 누렇게 변색하고 얼룩진 책을 베란다에 펼쳐 말렸다. 선인들의 포쇄를 흉내 낸 셈이다. 세월 속에 책은 바랬으나 문장은 또렷했다. 내친김에 햇빛과 바람이 드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으며 해묵은 머릿속도 꺼내 말렸다.
배은정 2026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