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경제형벌 합리화’ 강조에도 정부-국회, 후속 입법절차 안나서 기업 “투자했다 감옥 갈라” 몸사려 美-英 등 형법상 업무배임죄 없어
광고 로드중
국내 4대 그룹 계열사의 한 사장은 배임죄가 주는 압박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경영진이 선의로 내린 전략적 판단이라도 결과적으로 손해가 발생하면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며 “잘되면 기업가의 선구안과 과감한 투자로 평가받지만, 안 되면 곧바로 배임이 되는 구조에서는 특히 전문경영인이 보신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계는 상법 개정안이 세 번째 개정을 앞둔 데다,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통과되는 등 노동 친화 입법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기업 부담을 줄이는 배임죄 개편만 뒤로 밀리는 현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이미 상법, 노봉법으로 사법 리스크가 커지고 있어 배임죄 리스크라도 줄여달라는 요구다. 미국발 관세 부담 등 외부 경영 리스크도 계속 커지고 있어 이제 더 이상 손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광고 로드중
지난해 당정은 상법 개정과 배임죄 처리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정부 여당이 모두 배임죄 형벌이 과도하다는 데 뜻을 모았고, 폐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이뤄지고 있지만 정부도 국회도 아직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법무부의 정부안 마련에 시간이 소요되면서 입법이 연말에야 가능할 것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형법, 상법,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를 폐지하고, 민사를 통한 금전적 책임을 강화하는 대체 입법을 만드는 작업에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원내지도부의 한 의원은 “배임죄에 속하는 범죄들을 분류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당과 정부가 소통하며 진행하는 중”이라며 “당장 입법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여당 내 강경파와 시민단체 등이 배임죄 개편에 반대하고 있어 추진 속도가 붙지 않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사이 기업들은 인공지능(AI) 전환에 대응하기 위해 과감한 인수합병(M&A)이나 투자에 나서려 해도 배임죄에 해당이 될까 위축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재계는 특히 현행 배임죄의 가장 큰 문제로 ‘불명확한 기준’을 꼽는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국내 상장기업 15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84.9%가 “배임죄 기준이 불명확하다”고 답했다. 당시 상황에 비춰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더라도, 사후적으로 결과가 나쁘면 형사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인식이 경영 판단 전반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광고 로드중
● 해외 주요국, 이미 형벌 대신 경제적 책임
해외 주요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배임죄 적용 범위가 훨씬 넓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에는 형법상 배임죄라는 독립된 범죄 항목이 없다. 만약 경영 판단으로 회사나 주주에게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주주대표소송을 통해 책임을 묻는다. 형벌이 아니라 경제적 책임으로 해결하는 구조다.
배임죄를 최초로 법전에 규정한 독일도 ‘경영판단 원칙’을 명문화해, 적절한 정보에 근거해 선의로 내린 결정이라면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일본은 배임죄를 두고 있지만, 고의성이 명확히 입증된 경우만 처벌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일본의 배임죄 기소 인원은 연평균 31명에 그친 반면에, 한국은 965명으로 31배에 달했다.
광고 로드중
이민아 기자 omg@donga.com
구민기 기자 k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