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석유, 석유.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 뒤 첫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석유’라는 단어를 스무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충격적인 급습 작전이 결국 베네수엘라 석유 때문이었음을 확인시켜 준 셈이죠. 독재자 마두로를 변명해 주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석유를 탐낸다”던 그의 주장은 사실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그렇게 베네수엘라 석유에 집착할까요. “18개월 안에 베네수엘라 석유 인프라를 완전 재가동하겠다”는 그의 공언은 믿을 만할까요. 오늘은 마두로 체포와 베네수엘라 석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
미국은 원하는 대로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을 되살릴 수 있을까. 사진은 베네수엘라 최대 유전 지역인 오리노코 석유 벨트에 있는 베네수엘라 석유공사(PDVSA) 시설의 사진. PDVSA 제공
*이 기사는 1월 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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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유사는 싸고 더러운 기름을 원한다
2018년 미국은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원유 생산량 1위에 올라섭니다. 2010년대의 ‘셰일 혁명’ 덕분이었죠. 텍사스 퍼미안 분지를 중심으로 셰일 오일·가스가 펑펑 쏟아져 나오면서 미국은 압도적인 1위 산유국 지위를 유지 중이죠.이 미국산 석유는 저유황의 ‘경질유(Light Crude)’입니다. 석유는 가벼운 경질유와 무거운 중질유로 나뉘는데요. 경질유는 불순물이 적고 정제하기가 훨씬 쉬운, 한마디로 고급 석유이죠.
그런데 이 질 좋은 석유가 쏟아져 나오는 미국도 석유를 수입합니다. 수입되는 건 주로 중질유(Heavy Crude)이죠. 무겁고, 끈적거리고, 정제 과정이 복잡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더러운 불순물이 많이 나오는 그런 석유입니다.
비싸고 좋은 기름은 수출하고, 질 떨어지는 기름을 되레 수입하다니. 언뜻 보면 이상한데요. 여기서 중요한 건 원유의 질이 아니라 정유사의 마진입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된 중질유. PDVSA 제공
멕시코만에 모여있는 미국 정유시설은 대부분 셰일혁명이 본격화된 2010년 이전에 만들어졌고요. S&P글로벌에 따르면 미국 전체 정유시설의 약 70%는 중질유 처리 시설이라죠. 끈적거리고 무거운 중질유를 싼값에 수입해 와서, 이를 분해하고 정제해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것. 예나 지금이나 이게 정유사의 핵심 수익모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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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불안한 건 캐나다산 중질유 공급도 영원히 안정적이란 보장은 없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트럼프 관세폭탄 충격파로 각성해 버린 캐나다. 석유를 미국 이외 나라로 수출하겠다며, 해안으로 연결되는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에 속도를 내는데요. 캐나다산 중질유의 대체품이 필요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1월 3일 마러라고에서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체포 사실을 언론에 발표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 AP 뉴시스
미국에서 가깝고 가격까지 저렴한 베네수엘라산 중질유를 다시 수입해 올 수 있다면? 미국 정유업계로선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미 마두로 체포 직후 뉴욕증시에서 발레로 에너지, 마라톤 페트롤리엄, 필립스66 같은 미국 정유사 주가가 급등한 게 이를 드러내 주죠. “정유사 시스템이 설계 목적에 맞게 운영되면서 생산량과 마진이 더 높아질 것”(S&P 글로벌의 데브닐 초우더리 부사장)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반면 캐나다 내추럴 리소시스 같은 캐나다의 석유생산업체 주가는 급락했습니다. 미국 수출을 둘러싼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테니까요.
국제유가를 미국이 좌우한다면?
여기까진 산업 측면의 좁은 얘기였고요.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 보죠. 이미 북미와 남미 석유 자원 중 상당 부분을 운영 중인 미국이 세계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까지 장악하게 된다면?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하비에르 블라스의 표현대로 “트럼프는 이제 자신만의 석유 제국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이 사실상 국제 유가를 좌지우지할 엄청난 힘을 쥐게 된다는 것을 뜻하죠.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유전지대의 석유시추 시설 모습. PDVSA 제공
만약 미국이 원유 생산량을 콘트롤해서 유가 인상 또는 인하를 결정하는 스위치를 손에 넣는다면 가장 긴장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석유 수출에 경제를 의존해 온 적대국들, 즉 러시아와 이란입니다. 미국이 유가 급락을 초래하며 압박한다면 이들 나라의 경제는 고사 위기에 놓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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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우위를 점하게 될 겁니다. 그동안은 에너지 안보 때문에 사우디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리 미국이라도 중동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엔 섣불리 나서진 못했는데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게 되는 거죠. 지정학적 ‘힘의 추’가 미국으로 확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1월 5일 뉴욕 연방법원에 출석한 마두로 대통령과 그의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의 모습. AP 뉴시스
하지만 트럼프가 꿈꾸고 있을 이 무시무시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기 위해선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죠. 지난 20년 동안 무너진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을 재건하는 겁니다. 1990년대 하루 350만 배럴에서 지난해 90만 배럴 수준으로 크게 쪼그라든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을 되돌려 놔야 하죠.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대로 “거대한 미국 석유회사들이 들어가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심각하게 망가진 석유 인프라를 재건해 돈을 벌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얼마면 돼? 아무도 몰라!
투자 부족, 기술력 상실, 노후화된 시설, 인력 이탈, 경영 부실과 내부 부패. 한때 세계 4위 석유회사일 정도로 잘 나갔던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공사(PDVSA)가 어떻게 완전히 망가졌는지를 이미 설명해 드린 적 있죠. (딥다이브 베네수엘라 편)베네수엘라에선 많은 시추 현장이 버려졌습니다. 송유관에선 기름이 줄줄 새고, 한때는 최첨단이었던 정유시설은 이제 고장 나서 가동이 쉽지 않죠. 무엇보다 이걸 다시 운영할 전문인력도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난 10년간 조국을 떠난 베네수엘라 국민만 780만명에 달하니까요.
그래서 비관적 전망이 줄이어 나옵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을 재건하겠다는 약속을 “위대한 도박”이라고 평했죠. 너무 오래 걸리고 천문학적인 투자비가 들 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 분석 기업 리스타드 에너지는 베네수엘라 석유 생산량을 15년 전 수준(하루 200만 배럴)으로 되돌리려면 2030년대 초까지 무려 1100억 달러(약 160조원)의 설비투자가 필요하다고 예상했죠. 2024년 미국 주요 석유회사 투자비의 2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을 회복하기 위해선 망가진 석유 인프라의 복구를 위한 상당한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PDVSA 제공
하지만 좀 더 낙관적인 시각도 존재해요. 베네수엘라가 산유국으로서 갖는 장점이 뚜렷하기 때문인데요. 일단 유전 지도가 이미 작성돼 있기 때문에 새로 탐사에 나서야 할 위험이 없고요. 모든 유전이 해안 또는 마라카이보호수 같은 얕은 수역에 있기 때문에 채굴 비용이 매우 저렴합니다. 이웃 국가 가이아나처럼 석유를 찾아 심해까지 나갈 필요가 없는 거죠.
그래서 또 다른 컨설팅 기업 우드 매켄지는 베네수엘라가 소규모 투자 만으로 1~2년 이내에 생산량을 하루 200만 배럴까지 회복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많은 유정이 간단한 보수작업만 필요할 걸로 예상합니다. 새로운 자본 지출(설비투자)을 많이 들이지 않고, 운영비용을 통해 생산량을 늘릴 수 있을 거예요.”(우드 매켄지 아드리안 라라 애널리스트).
세계적인 에너지 컨설팅 전문 회사의 분석조차 이렇게나 극과 극이라니. 좀 당황스러운데요. 그만큼 베네수엘라의 유전을 정상화하려면 뭐가 어디에 얼마나 필요할지, 전문가들도 아직 제대로 알 수 없단 뜻이겠죠.
독재정권 2인자를 지지한 트럼프
지금처럼 국제유가가 낮은 상황에서, 돈이 얼마나 들지도 모르는 베네수엘라 석유 사업에 뛰어드는 게 맞을까요? 의문은 많지만, 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 재건에) 엄청난 금액을 지출할 거고, 비용은 석유기업들이 부담한다. 이후 우리(정부)로부터 또는 수익을 통해 그 비용을 상환받을 것”이란 구상을 이미 밝혔죠. 9일 트럼프 대통령은 주요 석유기업 경영진을 직접 만날 예정이죠. 아마도 미국 석유회사들은 베네수엘라에 얼마나 투자한다고 할지, 지금쯤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겠죠.1월 5일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된 델시 로드리게스가 카라카스 국회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AP 뉴시스
그리고 이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이겁니다. 베네수엘라 정치가 안정될 것인가. 독재자는 사라지고 나서, 되레 나라가 정치적 혼돈에 빠지는 경우는 흔합니다. 미국이 2003년 사담 후세인을 몰아냈지만, 내전에 빠지면서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한 이라크가 바로 그 대표 사례이죠.
가뜩이나 미국 석유기업은 이미 2004~2007년 우고 차베스 정부의 국유화로 베네수엘라에서 자산을 강탈당한 기억이 생생하거든요.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믿을 만한 정권이 들어서지 않는 한 흔쾌히 투자에 나설 리가 없는데요.
바로 이 점을 트럼프 정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마두로 이후의 베네수엘라를 둘러싼 상황이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좀 다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마두로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나라를 이끄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힌 거죠.
독재자를 체포한 미국이 독재정권의 2인자를 지지한다? 이거 뭔가 어색한데요.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에 대해선 이렇게 선을 그었습니다. “마차도는 차기 지도자 역할을 하긴 어려울 거다. 그는 내부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마두로 체포에 환호했던 베네수엘라 야권에 찬물을 끼얹은 겁니다.
1월 5일, 베네수엘라 친정부 조직인 오토바이 갱단 ‘콜렉티보’ 조직원이 수도 카라카스에서 무장한 채 순찰 중이다. AP 뉴시스
결국 마두로 대통령만 쏙 빼놓고 나머지는 그대로 둔 ‘온건한 독재체제’가 당분간 이어질 판인데요. 트럼프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지금 미국에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미국 기업의 석유사업 진출을 빠른 속도로 성사시킬 수 있는 유능한 행정가이고요. 2024년부터 석유 사업을 총괄하며 해외 석유 기업들과 협상을 진행해 온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반체제 인사 마차도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특히 베네수엘라 국채에 투자한 미국 투자자와 석유 업계 관계자들이 급진적인 마차도 대신 로드리게스를 강하게 밀었다는군요.
베네수엘라의 민주화? 새로운 자유주의 정권 수립? 그런 건 미국 정부의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철저히 미국의 실리를 따른 선택인데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보를 지낸 킴벌리 브라이어의 말대로 “매우 냉철한 현실주의적 접근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트럼프의 방식이로구나, 새삼 깨닫게 됩니다. By.딥다이브
마두로가 체포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카라카스의 모습은 변한 게 없습니다. 언론인들이 체포됐고, 총을 든 군 방첩요원들이 대통령궁 인근을 순찰하고, 친정부 성향의 오토바이 갱단이 거리를 활보하죠. “베네수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언을 믿을 수 있을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미국의 마두로 체포, 역시 석유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정유사는 값싸고 끈적거리고 불순물이 많은 베네수엘라의 중질유가 필요했죠. 그게 더 수익성이 좋기 때문입니다.
-이제 트럼프는 거대한 석유 제국을 운영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국제유가를 좌지우지하는 버튼을 손에 넣게 된다는 해석도 나오죠. 지정학적 판도를 뒤바꿀 전환이 될 겁니다.
-그러려면 일단 베네수엘라에 묻힌 막대한 석유를 파내야겠죠. 망가진 인프라를 고쳐서 석유생산량을 늘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에 대한 전망이 엇갈립니다.
-더 빨리 베네수엘라 석유를 얻고 싶은 트럼프 정부. 마두로 뒤를 이을 지도자로 2인자였던 로드리게스를 지지했습니다.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따르고 있죠. 베네수엘라에 미국이 지지하는 ‘온건한 독재체제’가 유지되면서 ‘민주화의 봄’은 당분간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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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