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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과거를 지우는 일?… 새해는 지난해를 깊게 새길 때 열린다[김대균의 건축의 미래]

입력 | 2025-12-31 23:10:00

추사에게 배우는 새해 시작법
결심의 나열에 앞서 원칙 세워야
인류가 돌-금속에 글자 새긴 것도 오래 지켜가겠다는 약속의 일환
추사 “옛것 고찰해 지금을 고증”
지난 시간을 산과 바다처럼 대해 말년엔 가족과 일상 통해 美 발견




국보 제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1844년 제주도 유배 시절 그린 것으로, 삶의 어려움(겨울)에도 한결같이 자신을 지켜주는 주변(소나무)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담백한 의지(단순한 형태의 집)를 담았다. 사진 출처 국가유산포털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2026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를 디딤돌 삼아 새해의 행복이나 건강, 성공, 소소한 일상을 마음에 새긴다. 새해 실천 계획을 세울 때 세부적인 목록을 통합하는 큰 ‘원칙’이 있으면 조금은 유연하면서도 계획의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원칙(原則)에서 원(原)은 언덕 아래에서 물이 시작되는 샘을 뜻하고, 칙(則)은 솥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는 뜻이다. 수천 년 전 솥에 글자를 새겨 넣은 이유는 신과 소통하기 위해서였다. 한자의 의미로 살펴보면 원칙은 ‘어떤 것의 시작을 하늘에 약속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작의 마음을 잘 간직하는 것이 원칙의 의미라면, 새해 원칙을 잘 세우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매우 적절한 방식이다.

영원함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영원히 무엇을 남기기 위해 인간은 돌이나 금속에 그림이나 글을 새긴다. 이렇게 돌이나 금속에 새긴 문자를 연구하는 학문을 ‘금석학’이라고 한다. 북한산 비봉은 산봉우리에 비석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비석이 신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힌 이는 바로 추사 김정희(1786∼1856)다.

추사는 서예뿐만 아니라 금석학의 대가이기도 하다. 18∼19세기 근대 유럽은 과학의 발달로 과학적 검증이 학문의 기본이 됐다. 당시 청나라(1636∼1912)도 유럽과 유사하게 증거나 고증을 통해 고전을 설명하는 고증학이나 금석학이 크게 발전했다. 추사는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과 같은 청나라의 대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조선 금석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추사는 “옛것을 고찰해 지금을 고증하는 것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攷古證今 山海崇深)”라고 옛것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썼다. 지난 것을 산이나 바다처럼 높고 깊은 것으로 삼아 지금을 이해하는 추사의 태도는 지난 것은 털어버리고 새로움만 채우려는 새해의 조급한 우리의 마음을 조금은 멈추게 만든다. 지난해를 산과 바다처럼 높고 깊게 대하는 방식은 새해를 맞이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될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가 제주도 유배 시절인 1844년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린 문인화다. 세한도는 동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제를 담고 있다. 도연명(365∼427)은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시로 쓴 중국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는 41세 때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음을 읊은 시이다. 그 시에 나오는 구절 ‘무릎 하나 겨우 들일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안한가(審容膝之易安)’는 동양 회화의 주요 소재가 되어 이후 자연 안의 소박한 집에 대한 수많은 그림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안빈낙도를 표현한 대부분의 그림들은 근경과 원경의 풍경을 동시에 그린 뒤, 집은 근경에 작게 표현했다. 하지만 추사는 소나무 두 그루를 전면에 배치하고 원, 삼각형, 사각형 등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의 집을 이에 겹쳐 그린 뒤, 집의 왼쪽에 측백나무 두 그루를 더해 세한도를 완성했다. 멀리 펼쳐진 풍경을 삭제하고 집을 중심으로 근경의 구도로 그려 당시 파격 그 자체였다.

이 그림은 추운 겨울이 돼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한결같은 푸름을 알게 된다는 것을 표현했다. 전형적인 안빈낙도의 철학에 더해 개인의 감성과 의지를 함께 담은 것이다. 추운 겨울은 삶의 어려움을 은유하고,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한결같이 자신을 지켜주는 주변을 상징한다. 그리고 양쪽 나무 사이 중앙에 위치한 군더더기 없는 집의 형태는 나를 대변한다. 잊고 지내는 주변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살고 있는 집이 나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세한도는 새해 소중한 주변 사람과 집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운다.

 추사가 말년에 남긴 예서체 대련 ‘대팽고회(大烹高會)’.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을 느꼈던 추사를 보여준다. 사진 출처 국가유산포털

추사는 제주도 유배 이후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1년간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를 마친 후 과천의 과지초당으로 돌아와 4년간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71세(1856년)로 생을 마감한다. 추사는 명문가의 종손이었지만 성리학이 주류인 조선에서 금석학과 고증학에 몰두했고, 중인인 이상적을 제자로 두었으며, 천민으로 취급받던 초의선사와 깊이 교류했다. 동시에 그는 직설적이고 모난 성품으로 세상과 쉽게 어울릴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칠순이 되어 과지초당에서 쓴 예서체 대련 ‘대팽고회(大烹高會)’의 내용은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사의 마음을 확인하게 한다. “가장 좋은 요리는 두부, 오이, 생강과 나물이고, 가장 좋은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가 함께하는 것이다(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이 문장과 글씨를 통해 일상과 예술, 비범함과 평범함을 초월한 경지에 도달한 추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노자는 ‘도덕경’ 45장에서 “완성은 오히려 모자란 듯 비어 있을 때 그 쓰임이 지속되고, 큰 충만은 오히려 비어 있어 보일 때 끊임이 없다”고 말한다. 이 글에 나오는 위대한 기교는 오히려 졸렬한 듯 보인다는 뜻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은 추사 말년의 추사체를 가장 잘 대변하는 문장이다. 새해 다짐은 마음이 커지고 소란해져 평범함 속에 있는 소중함을 놓치기 쉽다. 그러기에 새해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적인 식사는 새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 것이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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