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광고 로드중
코로나19 팬데믹 한복판에서 전 세계에 공급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실에서 출발했다. 제너연구소와 백신그룹의 후보물질을 바탕으로 스핀오프 기업 ‘백시텍’이 서고, 글로벌 제약사와 투자자, 국제기구의 자금이 겹겹이 붙었다. 연구 성과가 기업과 자본을 타고 인류의 위기를 돌파하는 해법으로 증폭된 것이다. 핵심은 ‘좋은 연구’ 자체가 아니다. 연구를 민간 자본과 전문성에 끝까지 잇는 기술사업화 플랫폼이 이를 뒷받침했다는 점이다.
국내로 시선을 돌려보면 상황은 사뭇 다르다. 연구는 넘치는데 시장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좁고 험하다. 내년 35조 원대, 매년 30조 원 안팎의 연구개발(R&D) 예산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논문·특허, 소규모 기술 이전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보고서는 쌓이는데 산업과 일자리, 새로운 시장으로 이어지는 파급력 높은 성과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연구 성과가 경제와 생활의 변화로 이어지려면 연구기관·기업·금융을 다리처럼 이어줄 제3의 주체가 필요하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술 선도국이 선택한 장치가 기술사업화 전문회사다.
올해 7월 출범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기술사업화 전문회사인 ‘키스트 이노베이션’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조직은 공공 연구성과를 모아 민간의 투자·사업화 역량과 결합시키는 딥테크 인큐베이터다. 과거 사업화전문조직(TLO)이 계약과 로열티 관리에 머물렀다면, 키스트 이노베이션은 연구기획 단계부터 시장과 비즈니스 모델, 창업팀을 함께 설계하고 지분 투자까지 동행한다. 변리사·투자심사역 등 전문가를 전면에 세우고, 민간 시스템을 반영한 성과 연동 보상과 유연한 투자 구조도 도입했다. KIST 기술 기반 스타트업 ‘큐어버스’가 알츠하이머 신약 후보로 약 5000억 원 규모의 해외 기술 수출을 성사시킨 사례는 한 연구소의 파이프라인이 스타트업을 거쳐 글로벌 시장과 만날 때 어떤 결과를 낼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광고 로드중
바로 이 지점에서 기술사업화 전문회사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공공기관은 공익적 책무와 인프라 운영에 집중하고, 전문회사는 R&D 성과를 묶어 스타트업 설립과 민간 공동 투자, 글로벌 파트너십을 전담한다. 위험은 민간과 분담하고, 성공은 배당과 지분 가치 상승을 통해 국민과 기업이 함께 나누는 구조다. 연구실의 아이디어가 수억 명의 생명을 구한 백신으로 이어졌듯, 우리의 공공 R&D도 그 궤적과 규모를 지향해야 한다. 민관 합작형 기술사업화 플랫폼을 통해 R&D 성과가 연구실을 넘어 국민이 체감하는 일자리와 성장, 더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