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이 청와대 순차 이전을 진행 중인 18일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직원이 탈부착 업무표장을 설치하고 있다. 뉴스1
대통령마다 청와대를 나오겠다던 시절이 있었다. “공간이 의식을 결정한다”던 전임 대통령 윤석열이 구중궁궐 청와대 아닌 시내 한복판 용산에서 친위 쿠데타를 자행하다 실패했다는 건 웃기는 비극이다.
불통의 상징 청와대로 복귀해도 이재명 대통령은 3실장(비서실장·정책실장·국가안보실장)과 수시 대면회의를 할 수 있게 집무실을 한 건물에 둔다고 강조했다. 그만큼 소통을 중시한다는 의미겠으나 되레 걱정스럽다. 대통령 보좌기능에 그쳐야 할 대통령비서실이 자기네들끼리만 너무나 소통을 잘한 나머지, 내각 꼭대기에 올라앉아 ‘청와대정부’로 군림한 문재인 정권을 따라할까 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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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6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오른쪽)가 청와대 상춘재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시기라 마스크를 썼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여권과 개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위헌 소지를 지적하면, 대통령실 누군가는 아니 적어도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안 됩니다” 말해야 했다. 최고지도자에게 “NO” 해야만하는 공적 직업이 언론이고, 대통령비서실장이며, 사적으로는 대통령 부인이 있다(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김건희는 제외하자).
여당이 하겠다는데 대통령실이 어쩌겠느냐고 변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상호는 분명 “대통령실과 여당 간 공감대가 있다”고 했다. 이 대통령도 9월 “내란특별재판부가 무슨 위헌이냐”고 말한 바 있다. 그런 대통령 생각이 잘못됐음을 대통령비서실은 말했어야 했다.
강훈식 비서실장이 19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대통령 앞서 비서실장이 “검토” 지시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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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사태 직후인 1일, 강훈식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대규모 유출 사고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며 개선 방안을 검토하라고 사실상 대통령같은 발언을 했다. 거의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친 이 중차대한 사태에서 일국의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밀린 셈이다.
3선 의원을 지낸 강훈식의 똘똘함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잘났어도 비서는 비서일 뿐이다. 정부 조직법 14조는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기 위하여 대통령비서실을 둔다’고 돼 있다. 대통령비서실 직제 제3조는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명을 받아 대통령비서실의 사무를 처리하고, 소속 공무원을 지휘·감독한다’고 못박아뒀다.
● 환관이 내각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으면
강훈식 비서실장(가운데)이 지난달 9일 서울 종로구 국무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 앞서 김민석(왼쪽) 국무총리,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팔짱을 끼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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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참모가 내각 꼭대기에 올라앉아 대통령보다 앞서갔다고 일이 잘 돌아가면 또 모른다. 부처에선 귓등으로도 안 들은 눈치다. 그러니 12일 개선 방안 보고가 나오기는커녕 대통령의 똑같은 지시가 생중계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 실장 한 마디에 평가원장 사임까지
오승걸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지난달 13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운영 상황을 설명하기 전 인사하고 있다. 세종=뉴스1
심지어 “강 비서실장은 보건복지부, 성평등가족부,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와 저출산고령화위원회 등 관련부처와 유관기관에 대해 중증장애인과 중증환자 간병 부담을 가정과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근본적인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는 브리핑이다. 정부조직법에 따르면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명을 받아 각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감독하고, 기획재정부 장관이 부총리를 겸하게 돼 있다. 그럼 강훈식은 총리란 말인가? 아니면 총리급 비서실장??
강훈식이 말 한마디로 사람을 날리는 놀라운 신공을 보이긴 했다. 수능 ‘불(火)영어’ 지적 이틀 만에 오승걸 교육과정평가원장이 사퇴한 것이다. 8일 그는 “수능 영어 난이도 조절 실패로 수험생과학부모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며 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부에 책임 있는 대책 마련을 요청했다. 그러자 10일 오승걸이 책임지고 사의를 밝혀버렸다(실세 부속실장 김현지 들으라고 강훈식이 책임을 물은 거라면, 당신이 이겼다).
● 이번 비서실장은 대통령급이란 말인가
이재명 대통령이 비상계엄 1년을 맞은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빛의 혁명 1주년, 대국민 특별성명’을 발표한 뒤 출입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강훈식 비서실장(왼쪽)이 옆에서 보며 웃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 대통령 지지율이 높아 비서실장이 저러는지 모른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대전·충남 신속 통합 급물살 때문일 수도 있다. 첫 통합시장에 강훈식 차출설이 요란하다. 하지만 지방선거 공천은 당에서 하는 게 맞다. 이 정부가 탄핵당한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들을 따라한다면, 별꼴이 반쪽이다.
이번처럼 대통령비서실장이 들썩이지 않았어도 대통령 탄핵과 새 정부 출범 1년 만에 치러진 2018년 지방선거는 여당 압승이었다. 당시 대통령 문재인은 “청와대 모두와 내각이 잘해준 덕분”이라면서 국민 지지에 답하지 못하면 금세 실망으로 바뀐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강조한 비서실 덕목이 유능함과 도덕성, 겸손한 태도였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이름도 거룩한 ‘국민주권정부’의 대통령실은 과연 유능하고 도덕적이고 겸손한가. (27일 다시 ‘청와대정부’는 반대다(2)가 이어집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