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5인’ 중 한 명인 킴 필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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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천 전 국가정보원 국장
그중 6·25전쟁이 낳은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가 있다. 그는 1948년 외교관 신분으로 서울에 파견됐다가 전쟁 개전과 함께 북한의 포로가 된 영국 비밀정보국(MI6) 요원이었다. 블레이크는 포로 생활 중 전향해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뒤 휴전 직전 포로 교환으로 풀려났다. MI6로 복귀한 그는 이중 스파이가 되어 MI6 해외 조직망 등 고급 정보를 소련에 유출했다.
특히 1955년 독일 베를린에 파견되면서 대어를 낚을 기회를 잡았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MI6가 동베를린으로 통하는 지하터널을 건설해 소련 유선통신을 도청하는 최대 규모의 합동공작을 진행 중이었는데, 이를 소련에 제보해 조기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스파이 행각은 1961년 서방으로 망명한 폴란드 요원의 폭로로 들통났다. 그는 4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1966년 탈옥해 소련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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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비가 한국과 악연을 맺은 것은 1949년 미국에 파견되면서다. 정보협력관으로 CIA 등과 교류하며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사령부와 미 국방부 간에 오가는 작전계획 등을 소련에 넘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30년 가까이 실체를 숨겨 온 그는 소련 요원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노출 위기에 몰리자 모스크바로 도주했다.
간첩단 중 한국에 큰 타격을 안긴 또 한 명이 매클레인이다. 그는 졸업 후 영국 외교부에 들어가 미 핵무기 정보 등 동맹국의 외교·군사 동향을 수집해 소련으로 빼돌렸다. 무엇보다 그가 6·25전쟁 발발과 한반도 분단에 미친 영향은 컸다.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 미 ‘NSC-48/2 보고서’를 소련에 넘겨 스탈린의 남침 승인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핵무기 사용 없이 제한전으로 치를 것이며 중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당시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의 대응 전략을 소련에 보고해 중국의 참전에 큰 역할을 했다.
6·25전쟁 참전국이자 우방인 영국에서 자생한 간첩들이 오늘날 한국이 분단국가로 남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한국 역사에 큰 아픔을 준 ‘케임브리지 5인방’ 사건은 2011년 개봉된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스파이들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이는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증명됐다. 스파이는 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국가에 뼈아픈 역사를 남기기도 한다. 스파이 세계에도 나비효과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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