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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내 인생은 뭔가?’ 생각이 드는 부모들에게[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

입력 | 2025-12-21 23:06:00

〈233〉가족 뒤 남겨진 ‘나’ 찾기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얼마나 소중한지 설명할 수조차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부터는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간다. ‘가족’만 생각하며 정신없이 일하는 아빠, ‘아이’만 생각하며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보내는 엄마. 문득 거울에 비친 나의 지친 모습에 놀라 ‘내 인생은 뭔가’ ‘나는 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아빠가 말했다. 자신은 정말 가족을 위해 돈을 열심히 벌었노라고.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은 엄마하고만 속닥거리고 집안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이제라도 대화를 해보려 하지만 공감대도 찾을 수 없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도대체 내 인생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하고 외로워지기도 했다. 아이가 청소년기를 막 벗어날 무렵, 직장에서 위치가 위태로워질 무렵, 이런 감정을 느끼는 아빠들을 정말 많이 만난다. 그 아빠들이 털어놓는 쓸쓸하고 허전한 이야기에 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빠들은 눈물을 떨구지도 못하는 촉촉한 눈으로 말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아빠들이 명제를 바꿨으면 한다. ‘너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집안일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어’가 아니라 ‘내가 우리 가족을 정말 사랑한다면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야겠구나’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무심함을 인정하고 아이들과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보라고 조언한다. “아빠가 그동안 무심했던 것 같은데 미안하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바깥일만 잘하면 될 거라 생각해서 신경을 못 썼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라고 진솔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회사 직원들과 잘 지내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잘 생각해 보고 가족들에게 그렇게 다가가면 된다.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가져주고, 조금만 잘해도 칭찬하고, 고민이 있는 것 같으면 들어주고, 가끔 맛있는 것도 사준다. 직원들이 힘들어할 때 격려의 말을 건넨 것처럼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면 된다. 상황이 금세 달라지진 않겠지만 서서히 가족들이 아빠의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 엄마는 우리네 엄마들이 그렇듯 아이를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에게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이 “당신은 왜 이렇게 촌스러워?”라고 말한다.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훅 올라오는 느낌이다. 억울하다. 너무 억울하다. 아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당신이 언제 나한테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 준 적 있어?”라고 따진다. 남편은 태평하게 “사 입어. 카드 있잖아?”라고 대답한다. 아내는 이내 가슴이 답답해진다. 짧은 한숨이 뱉어진다. ‘그 돈이면 아이 학원 하나 더 보낼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이는 컸다고 엄마 말도 안 듣고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다니고, 공부도 대학도 시원찮아 보인다. 그럴 때 엄마는 ‘나는 뭔가?’라는 생각에 자신이 너무나 작고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안의 정체성 중 자신을 위한 것의 개수를 늘려 나갔으면 한다.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적은 비용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분명 하고 싶었던 문화생활도 있었을 것이다. 틈틈이 좋은 영화를 보고, 좋아하던 음악을 듣고, 작은 여행도 시작해 본다.

나를 버리고 아이를 위해 살았다고 지나치게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황금 시기에 내가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키웠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시간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시간이 소중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래도 억울함이 남아 있다면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당신이(네가) 요즘 가족에게 너무 무심한 것 같아 나(엄마)는 좀 서운해.” 그리고 저녁이라도 온 가족이 같이 먹자고 한다.

당신이 얼마나 배우자와 아이를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왔는지, 그 시간의 가치를 지금 아이들은 당연히 모를 수 있다. 아니, 모를 것이다. 배우자도 각자의 역할에 갇혀 책임감에 눌려 잠깐 잊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신들의 조건 없는 그 사랑은 그 자체로도 넘치게 숭고하다. 눈이 부시게 높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자. 큰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 가슴 벅차게 뿌듯해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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