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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권력은 왜 조선을 내세웠을까… 박람회 곳곳의 ‘보여주기 통치’[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입력 | 2025-12-17 23:06:00

식민통치 20년 기념 50일간 개최… 통치 정당성, 성과 부각하려 연출
‘조선식’ 통일된 6개 직영관 배치… 판로 개척차 日지역 조선어 표기
박람회 계기로 설계된 경성 관광… 정인섭은 조선신궁 제외 코스 짜



1929년 총독부가 조선박람회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조감도. 경복궁 신무문 밖까지 펼쳐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식민통치 무대 삼은 조선박람회


1929년 가을 조선박람회가 개최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이어 총독부가 주관하는 두 번째 공식 박람회로서, 이듬해로 다가온 식민통치 20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9월 12일부터 50일간 진행된 조선박람회장은 2년 전 동쪽으로 이축한 광화문을 정문으로 해 총독부 신청사, 근정전 뒤편의 공간 및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밖 부지 10만여 평에 마련됐다.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조성한 물산공진회장이 7만여 평이었으니 규모가 훨씬 커졌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단지 규모가 커진 것을 넘어 조선박람회는 14년 전의 물산공진회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병합 초기에 치른 물산공진회는 조선의 후진성과 일본의 선진성을 대비시켜 전시하는 데 주안점을 둔 단순한 구도였다. 그런데 조선박람회의 전시는 그럴 수 없었다. 여전히 조선의 후진성을 드러낸다면 이는 곧 통치 권력의 ‘무능’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조선박람회는 역설적으로 ‘조선’을 앞세웠다. 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박람회 기념사진첩’은 서두에서 경성의 시가지 전경을 보여주며 “경성부는 예부터 한양 또는 한성이라 부르며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 이씨 조선의 시조 이성계가 수도로 삼아 왕궁의 터를 이곳에 정한 이후로 반도의 정치, 교육, 경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고유 문화와 근대적인 문명을 서로 융합하여 바야흐로 반도의 수도로서 대경성의 건설에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경성의 정체성이 조선왕조의 수도라는 점에서 시작됐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사라진 조선왕조의 ‘계승자’는 총독부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일제는 통치 권력의 유능함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조선의 긍정적인 면모를 앞세웠다. ‘산업북관’의 건축 양식을 ‘조선식’이라고 설명했으나 사실은 한식과 일식이 뒤섞인 모습. 서울역사박물관·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박람회장 입구에서 경복궁 경회루까지는 좌우로 각각 산업남관, 산업북관, 쌀관(米館), 사회경제관, 심세관(審勢館), 미술공예교육관 등 6개의 총독부 직영관을 배치했다. 내용 면에서 식민통치에 의한 산업 발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그런데 박람회장 건축 책임자였던 총독부 건축과장 이와이 조자부로(巖井長三郞)의 표현이 흥미롭다. 6개 직영관의 건축 양식을 이른바 “조선식으로 통일”했다는 것이다. 물론 6개 직영관이 정말 조선식이냐는 논란도 있다. 실제 진짜 한옥 양식이 아니라 한식과 일식이 뒤섞인 건축 양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목할 대목은 직영관 양식이 얼마나 조선식을 진정성 있게 구현했느냐보다 그런 점을 표나게 내세운 총독부의 보여주기 전략이다. 이것은 조선 궁궐의 대표적 건축인 광화문∼근정전∼경회루를 잇는 동선에 놓인 6개 관의 배치와도 관계가 있다.

‘내지관’ 내 ‘시마네겐’이라는 조선어 표기. 서울역사박물관·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조선박람회의 또 다른 특징은 상당한 규모의 내지관(內地館)이다. 내지관은 일본 본토의 27개 현이 출품한 공동 전시관이다. 흥미롭게도 내지관의 지역별 코너명을 조선어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와카야마현은 ‘화가산현·和歌山縣’처럼 한자의 조선어 발음과 한자를 병기했고, 시마네현은 ‘시마네겐·島根縣’처럼 일본어 발음을 조선어로 표기하고 한자를 병기하기도 했다.

이는 전에 없이 내지관을 대규모로 설치한 목적과 관련이 있다. 1920년대 일본은 장기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조선박람회를 개최한 배경에는 일본 내 각 지역의 특산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판로를 개척하려는 일본 경제계의 요구도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각 지역명을 일본어를 모르는 다수의 조선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표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포함해 조선박람회는 총독부가 주관한 박람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격을 강하게 보인다. 여러 건축회사는 서양식 주택, 즉 ‘문화주택’을 출품했다. 이것은 일종의 본보기집(모델하우스) 격이었다. 박람회 폐회 후 이 주택은 실제로 판매되었다. 그런가 하면 박람회장 곳곳에는 일본과 조선의 여러 회사의 선전탑이 즐비했다. 선전탑을 세운 기업 중에는 오늘날에도 성업 중인 마루젠(丸善)잉크, 삿포로맥주 등도 포함되어 있다.

또 하나 조선박람회의 특징은 다양한 오락적 요소이다. 대표적으로 ‘어린이 나라(小供の國)’를 들 수 있다. 어린이 나라에는 세계 파노라마를 감상하며 달리는 어린이 기차, 비행기, 승마장, 해저여행관, 회전목마 등 다양한 놀이기구가 설치됐다. 오늘날의 테마파크를 연상하면 된다. 그리하여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이 찾았는데 당시 신문 보도 등에 따르면 어린이보다 더 놀이기구에 빠져드는 어른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어른이나 어린이 모두에게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신기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수산회가 설치한 대형 수족관, 외국인 연예단이 서커스를 공연하는 만국 거리(萬國街), 기생의 무용 공연이 펼쳐지는 연예관도 인기를 끌었다. 식민지관이라는 이름으로 설치한 타이완관이나 만몽관(滿蒙館) 등도 실은 이국적인 볼거리를 보여줄 목적이 컸다. 만몽관에 가면 사막지대에서 공수해온 낙타도 구경할 수 있었다.

50일간 열린 조선박람회의 유료 입장객은 100만 명에 가까웠다. 그 밖에 우대권 등을 받은 무료 입장객도 적지 않았다. 폐회를 앞둔 며칠은 하루 5만 명 이상 입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람회만 관람하고 돌아가는 단체 관람객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기왕 어렵게 경성 나들이를 한 김에 3일 정도 머무르며 시내 관광을 했다.

이를 위해 경성전기회사는 박람회 관람객을 위해 ‘경성전차안내’라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팸플릿에는 전차를 이용해 갈 수 있는 경성 시내와 근교의 명소들, 전차 요금표, 연중 시내의 행사 일정 등과 함께 박람회 관람객을 위해 편성한 임시 전차노선의 노선도를 담았다. 경성부가 직영하는 부영버스도 요금을 7전에서 5전으로 인하하고 임시로 차량 30대를 증차하여 박람회장을 경유하는 두 개의 임시 노선을 운행했다. 노선은 둘로 나뉘었는데, 각각 경성역과 훈련원 차고지에서 출발했다. 전자는 경성역 하차 승객, 후자는 경원선 왕십리역과 청량리역 하차 승객을 위한 노선이었다.

시내 관광 코스는 조선의 관광 행정을 총괄하는 총독부 철도국에서 짠 것이 기본으로, 병합 이후 일제의 도시 개발 ‘성과’를 보여주는 어느 정도 뻔한 코스였다. 상품진열관, 조선신궁, 은사과학관(남산 자락의 옛 총독부 청사), 장충단공원, 창경원, 미술품제작소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영문학 교수로 부임한 정인섭(1905∼1983)이 제시한 관광 코스는 이와 사뭇 달랐다. 그는 1929년 펴낸 ‘조선박람회안내’에서 광화문 사거리에서 출발해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종각 부근으로 오는 코스를 제안한다.

시작은 이렇다. “종로 네거리에서 동대문 쪽으로 향하여 가면 좌우로 조선인 상계를 좌우하는 각종 상점이 즐비하여 있다. 조금 가서 왼쪽의 적벽(赤壁)의 건물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현 서울YMCA)이다. 들어가서 견학할 만한 점이 많다.” 장충단공원에 대해서도 “현재 경성부영의 경영으로 공원이 되어 있는데 원래 이태왕비 명성황후의 변 때 충사(忠死)한 충의공 홍계훈, 이경직 기타를 섬긴 곳”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장소를 설명해도 총독부 철도국의 관광 안내에는 상세히 담겨 있지 않은 내용이 나온다. 무엇보다 정인섭이 제시한 코스에는 일제로서는 경성의 ‘핵심’ 관광지인 조선신궁이 빠져 있다. 그저 남산공원 소개에서 “이 산정(山頂)에는 500년 전부터 국사당(國師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선신궁이 되었으므로 서대문 외로 옮겨갔다”고 오히려 국사당을 중심에 두고 스쳐가듯 언급하고 만다. 비록 일제가 주관한 박람회를 계기로 만들게 된 관광 코스이겠지만, 정인섭이 보여주고자 한 경성은 총독부와는 분명히 달랐던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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