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세계관을 활자와 질감으로 남겨… 가장 느리고 정제된 언어로 표현한 럭셔리 하우스들의 매거진
빠르게 변화하는 콘텐츠와 짧아진 주의력이 지배하는 시대, 패션 산업의 화려한 중심부에서 뜻밖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바로 인쇄 매체의 부활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이제 스스로 출판사가 되어 잡지를 창간하고 있다. 이들은 마케팅 수단이 아닌 스토리텔링과 문화, 창의적 표현의 플랫폼으로 잡지에 주목한다. 이처럼 화려한 출판물들은 새로운 브랜딩 전략일까, 아니면 가치와 문화를 주도하려는 산업의 본능일까.
최근 인쇄 매체의 부활을 이끄는 중심에는 샤넬이 있다. 샤넬은 올해 6월, 예술·문화 활동을 조명하는 비주얼 아트북 ‘아트&컬처(Arts and Culture)’를 내놓으며 ‘왜 지금 다시 종이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했다. 지난 5년간 전 세계 예술가 및 문화 기관과의 협업을 진행하며 패션을 넘어 문화적 대화의 장으로 확장한 책으로, 패션 화보 대신 예술가들의 시선과 이야기를 250페이지에 담았다. 브랜드의 상징을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디올은 ‘디올 매거진’을 발행해 브랜드의 예술적 영감과 여성주의적 시선을 기록하고 있다. 무용수, 안무가, 조각가, 사진가 등 다양한 창작자의 스토리를 담았다. 인스타그램
정체성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
에르메스는 매거진을 경험형 공간으로 확장한 ‘르 몽드 에르메스 키오스크’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파리의 신문 가판대에서 영감을 얻은 오렌지빛 구조물로,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샤넬의 매거진 ‘아트&컬처’는 250페이지에 달하는 비주얼 아트 북 형태로, 패션 화보 대신 예술가들의 시선과 이야기를 담았다. 인스타그램
에르메스는 매거진을 경험형 공간으로 확장한 ‘르 몽드 에르메스 키오스크’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파리의 신문 가판대에서 영감을 얻은 오렌지빛 구조물로,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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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은 저널리스트, 작가, 예술가들과 협업해 도시의 진짜 매력을 소개한 ‘시티 가이드’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루이비통 제공
올해 발행한 최신 ‘아크네 페이퍼’에서는 ‘Gold’를 주제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금의 의미를 탐색했다. 아크네스튜디오 제공
올해 발행한 최신 ‘아크네 페이퍼’에서는 ‘Gold’를 주제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금의 의미를 탐색했다. 아크네스튜디오 제공
시인이자 작가인 소니 홀과 협업한 ‘생로랑 리브 드루아 에디션’. 생로랑 제공
그렇다면 이처럼 패션 하우스들이 다시 종이를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쇠퇴하는 전통 인쇄 매체와 분산된 디지털 환경 속에서 브랜드들은 이제 스스로 서사를 통제하고 문화를 발행하는 출판사가 되고 있다. 이는 옷이나 가방을 파는 행위가 아니라, 의미와 유산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무엇이 오래 남는가’에 대한 그들의 답은 분명하다. 한정된 지면 속, 시간과 정성으로 브랜드의 세계관을 엮은 한 권의 출판물. 종이는 여전히 가장 럭셔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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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