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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무상 치료제 폐지된 북한의 현실

입력 | 2025-11-24 23:09:00

19일 열린 평양 인근 강동군병원 준공식에서 김정은(가운데)이 빨간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올해 2월 착공한 강동군병원은 김정은이 4차례나 방문한 끝에 9개월 만에 완공됐다. 노동신문 뉴스1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2025년은 김정은이 병원에 꽂힌 한 해였다. 그는 19일 평양 인근 강동군병원 준공식에 참석했다. 올 2월 6일 착공식부터 시작해 이날까지 9개월여 동안 그는 이 병원을 4차례 방문했다. 지난달 준공한 평양종합병원도 올해만 3차례 찾았다.

그뿐만 아니다. 지난해엔 ‘20X10 정책’을 발표해 10년 동안 매년 20개 군에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하라고 하더니, 올해엔 여기에 더해 병원도 매년 20개씩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은이 인민 건강에 갑자기 지대한 관심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의료가 아주 괜찮은 돈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자기가 아무리 호통을 쳐도 인민이 주머니를 열지 않지만,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집을 팔아서라도 치료비를 낸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한국에는 북한의 무상 치료제가 폐지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조선은 돈이 없으면 치료를 못 받고 죽지만, 우리 공화국은 무상으로 인민을 치료한다”고 반세기 넘게 자랑해서 그런지 북한이 아직도 무상 치료제를 시행하는 줄 알고 있다.

북한 무상 치료제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사실상 사라졌다.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면 환자는 장마당에서 약을 사 오고, 그 약으로 의사가 치료하는 시스템이 됐다. 치료는 공짜가 아니었다. 환자는 배급이나 월급을 받지 못하는 의사에게 돈을 건네야 했다.

이런 유명무실하고 허울뿐인 무상 치료제는 2022년 8월 급격한 전환점을 맞았다. 이때부터 북한은 모든 병원 간판에서 ‘인민’을 떼 버리게 했다. 올해 준공된 병원들도 원래라면 평양종합인민병원, 강동인민병원이라 불려야 한다.

인민이 간판에서만 버려진 것은 아니다. 인민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접수비, 진단비, 치료비, 약값, 처방비, 입원비 등 모두 물어야 한다. ‘합법적인’ 치료비가 도입된 것이다.

한국과 북한의 병원은 이제 시스템에서는 별 차이가 없게 됐다. 하지만 1인당 소득으로 비교하면 한국이야말로 진정한 무상 치료 수준이다.

게다가 북한은 리(里) 단위 작은 병원과 시군급 병원, 도 병원, 평양종합병원 간의 치료비 격차가 엄청 심하다. 가령 올해 초 기준 군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한 번 찍으면 북한 돈 2만 원을 받았는데, 도 병원에서는 설비가 최신식이라는 이유로 6만 원을 받았다. 2만 원은 쌀 2kg 이상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중앙병원에 가면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가령 북한에 몇 대 없는 컴퓨터단층촬영(CT) 장비 사용료는 지난해 기준 70만 원 정도였다. 북한 고액 연봉 수령자도 1년에 70만 원을 벌지 못한다. 지난해 종양으로 평양에 올라가 후두절제술을 받은 한 지방 고위 간부는 입원 치료비까지 5000달러(당시 기준 북한 돈 약 4400만 원)를 썼다.

처방과 동시에 병원에서 판매되는 약 가격은 장마당과 거의 같다. 장마당에서 비싸지면 병원에서도 비싸진다. 장마당 약품은 간혹 불량품이 있지만, 병원 약은 신뢰도가 있어 환자들은 이왕이면 병원에서 산다.

김정은은 19일 강동군병원 준공식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이 병원은 건설 과정도 교본적이었지만 운영 과정도 지방 보건 발전의 우수한 본보기로 될 것”이라며 ‘혁명적 결행’ ‘우리식 보건 현대화’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북한 사람들은 본보기라는 강동군병원 치료비가 얼마로 책정될지 긴장하며 주시할 것이다.

사실 북한이 유상 치료제를 도입하든 말든, 어차피 인민은 수십 년 동안 돈 없으면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세상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우리식 보건 현대화란 것이 도입되면서 환자와 가족, 의사, 장마당 약장수 할 것 없이 모두 피해자가 되고 김정은만 수혜자가 됐다.

무늬만 무상 치료제하에서 의사에게 뇌물로 전달되던 돈은 이제 당국으로 들어간다. 정성제약종합공장, 순천제약공장 등에서 생산된 약품이 장마당 약장수를 대신한다. 또 국가가 정한 치료비가 뇌물 시대에 비해 훨씬 비싸지면서 환자와 그 가족의 부담도 엄청나게 커졌다. 이제 북한은 진짜로 돈이 없으면 치료도 못 받고 죽는 세상이 됐다.

김정은이 갑자기 병원을 많이 만들라고 채찍질하는 것을 보면 돈 냄새를 강하게 맡은 것 같다. ‘의료가 주머니 속 달러를 터는 데 제격이구나’라고 깨달은 것이다. 김정은이 인민들 좋으라고 저리 열심히 뛰어다니겠는가. 그런 것은 본 적이 없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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