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임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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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인 728조 원 규모로 짜여진 내년 예산안을 두고 이재명 대통령은 “인공지능(AI) 시대를 여는 첫 예산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주 예산안을 설명하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AI 시대에 하루가 늦으면 한 세대가 뒤처진다”며 22분간 AI라는 단어만 28차례 언급했다. AI 대전환을 국가 생존을 위한 돌파구로 삼고 집중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한 예산으로 올해보다 3배 이상 늘어난 10조1000억 원을 편성했다지만, 전체 슈퍼예산의 1.4%에 그친다.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지급한 13조 원의 민생회복 소비쿠폰 예산보다 적다. 심지어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발행 등을 위한 ‘민생·사회연대경제’ 예산은 26조 원,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과 서울대 10개 만들기 등에 쓰일 ‘지방거점성장’ 예산은 29조 원이 배정됐다. AI를 앞세워 생색을 냈지만 현금 살포에 가까운 선심성 예산이 압도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728조 ‘슈퍼예산’, 내년 국채이자만 36조
2년째 한 푼도 반영되지 않았던 지역화폐 예산은 내년 대거 부활해 총 24조 원의 지역화폐 발행을 지원하게 된다. 이 대통령의 대표 브랜드인 지역화폐 확대를 위해 정부는 대선 직후 운영 지침을 개정해 1인당 구매 한도를 70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높였다. 지역화폐 발행 때 국가 재정 지원을 의무화한 지역화폐법 개정안도 여당 주도로 8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농어촌 기본소득은 내년 시범사업을 시작해, 인구감소지역에 속한 7개 군(郡)의 23만 명 주민들이 매달 15만 원어치의 지역화폐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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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빌려서라도 뿌려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말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랏돈을 풀어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13조 원의 소비쿠폰을 뿌리자 소비가 7월 잠깐 회복한 뒤 두 달 연속 감소한 것처럼 선심성 사업은 반짝 효과에 그치고 물가만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예산안대로라면 내년에 사상 최대인 110조 원의 적자국채가 발행돼 나랏빚은 1415조 원을 넘어선다. 국채 이자로만 36조 원을 써야 할 판이다. 당초 2028년 50% 돌파가 예상됐던 국가채무 비율 또한 51.6%로 높아진다. 정부는 위험 수위가 아니라지만 부채 증가 속도가 이처럼 빠른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다.
표심 노린 ‘선심성 돈 풀기’ 걷어내야
예산안 법정 처리 시한인 다음 달 2일까지 국회의 시간이다.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사태로 정쟁이 격화되고 있지만 예산 심사를 내팽개쳐선 안 된다. 국민 혈세가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현금 살포성 예산과 포장만 요란한 비효율적 예산을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매표용 포퓰리즘’ 논란을 부르는 사업이 있다면 정부와 여당이 스스로 거품을 걷어내고 야당의 협조를 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의원들의 지역 민원성 ‘쪽지 예산’과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끼워넣기도 이젠 근절해야 한다. 빌려 쓴 씨앗이 마중물이 될지, 미래세대에 빚만 떠넘기는 폭탄이 될지 국회의 송곳 검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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