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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와 울새의 엇갈린 희비[서광원의 자연과 삶]〈114〉

입력 | 2025-11-11 23:06:00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영국에서는 도시 근처 농장에서 갓 짜낸 우유를 새벽마다 가정집에 배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배달원이 문 앞에 놓고 간 우유를 누군가 건드리는 일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양심은 있었는지 다 가져가지는 않고, 살짝 마신 정도였지만 모르는 누군가가 먼저 입을 댄 우유를 마신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한두 집의 일도 아니었다. 어쩌다 가끔 벌어지던 일이 점점 빈번해지자 뜬눈으로 배달된 우유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생겼고, 마침내 범인을 찾아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괘씸한 일을 벌였을까?

놀랍게도 이 경범죄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주변의 새들이었다. 특히 박새와 울새가 단골 범인이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1900년대 초에는 우유 살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배달된 우유를 가정에서 끓여 마셨다. 그런데 우유가 문 앞에서 한동안 상온 상태로 있게 되면서 우유 속 지방 성분이 위로 떠올라 윗부분에 크림층이 생겼고, 새들은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새들은 우유 소화 효소가 없어 우유를 마시진 못한다. 하지만 유당은 낮고 지방이 풍부한 크림은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집집마다 ‘고급 요리’가 놓여 있는 셈이니, 새들이 이걸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범인이 밝혀졌지만 쉽게 잡을 수는 없으니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엔 우유병에 뚜껑이 없어서 사람들은 작은 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병 위에 판자나 돌멩이를 얹어 두곤 했다. 그러다 1940년 무렵 알루미늄 뚜껑이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새들에게 우유병은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그림의 떡’이 됐다.

하지만 이미 ‘맛’을 알아버린 새들이 날마다 문 앞의 ‘고급 요리’를 보고 어찌 구경만 하고 있겠는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박새들은 마침내 얇은 알루미늄 뚜껑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일이 생겨났다. 뚜껑을 뚫는 법을 터득한 박새들이 신기술을 빠르게 퍼뜨려 1950년대 초에는 영국 전역에서 날마다 ‘특식’을 즐긴 것. 반면 울새들은 끝내 그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중에 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이런 희비의 갈림은 생존 방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박새는 보통 예닐곱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서로 교류가 활발하다 보니 새로운 학습에 강하다. 알루미늄 병뚜껑을 뚫는 ‘혁신’도 이런 사회적 학습을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반면 울새는 영역성이 강해 자기 구역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몇몇 뛰어난 소수가 뚫는 법을 터득해도 그 혁신이 쉽게 퍼지지 못했다. 박새들이 잘 먹고 잘 사는 동안 울새가 특수를 누리지 못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만 박새의 특수는 새로운 병뚜껑과 바로 마실 수 있도록 한 우유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엇갈린 희비는 새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변화가 빠른 세상에서 울새처럼 고정된 삶의 구조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가두게 만든다. 처음엔 필요해서 고수하던 것이 어느 순간 고정화되면 갇히게 된다. 오랜 생명의 역사가 말해주듯 변하는 세상에서 고정된 삶은 정해진 결과로 향한다. 수시로 지금의 삶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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