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얼굴의 정의’ 평등 허상 풍자 독재정권이 시민의 외모 평균화해… 불평등 제거하려다 획일화만 남겨 국가가 모든 차이 교정하려다 보면 전체주의 위험, 자유 보장이 정의
영국 작가 레슬리 하틀리의 소설 ‘얼굴의 정의’는 사람들의 얼굴을 획일적으로 성형해 아름다움의 차이를 없앤 독재 정권의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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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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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을 지운 평등주의의 허상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타고난 얼굴도 시간이 지나면 경험과 생각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각자 고유한 자신만의 얼굴을 갖고 태어난다. 부모의 유전자가 결합해 만들어진, 세상에 하나뿐인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기형을 안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아름답고 잘생긴 얼굴로 태어난 사람도 있다. 태생적 조건에 따라 얼굴의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큰 차이가 생겨난다.》
소설 ‘얼굴의 정의(Facial Justice)’는 영국 작가 레슬리 하틀리가 196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특권과 시기심을 없애기 위해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사람도 없고, 못생긴 사람도 없도록 얼굴을 외과적으로 수술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수술을 주도하는 건 핵 전쟁 이후 지상에 들어선 독재 정권이다. 인류 파괴에 대한 집단적 죄책감을 안고 있는 정권은 외모로 인해 질투가 생기는 것을 막고자 모든 시민에게 삼베옷을 입힌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 ‘야엘 97’은 외모로 인해 특권을 누리고 다른 여성들의 불만을 산다는 이유로 ‘얼굴 정의부’에 신고된다. 이후 그는 사회에 잘 어울리기 위해 ‘얼굴평등센터’에서 합성 ‘베타(Beta)’ 얼굴로 교정 수술을 받는다.
그러나 강제적인 ‘베타화’는 오히려 그의 반항심을 키우고, 결국 정권에 맞서는 저항 단체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은 현대 복지사회의 약점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국 작가 앤서니 버지스도 이 작품을 “전후 영국 복지국가의 경향을 훌륭하게 투영한 소설”이라며 1939년 이후 영어권 최고의 소설 99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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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정치철학자 볼프강 케르스팅에 따르면 이러한 ‘평등주의적 정의의 정치적 프로그램’은 무작위로 분포된 미적 특성을 안면 성형을 통해 모든 사람을 균형 잡힌 얼굴로 재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정의가 실현된 사회에는 미적 평균만이 존재할 뿐, 개인의 신체적 개성은 사라진다. 태생적으로 잘생긴 사람이 연예인이 되며 누리던 특혜도 없어지고, 사회에는 균일한 특성을 지닌 평범한 얼굴만 남는다. ‘얼굴평등센터’는 자연이 만든 불공정을 제거해 미의 사회적 권력을 무너뜨리고자 하지만, 그 결과는 개성이 없는 모두가 똑같은 얼굴의 생산뿐이다.
불평등의 문제는 얼굴뿐 아니라 경제적 영역에서도 적용된다. 흔히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삶의 출발선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르다. 양극화를 없애고 보편적 복지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부모 세대의 피땀 어린 노력과 저축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출발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가가 직접 나서 우연히 주어진 개인의 행운과 불운을 모두 수정하려는 시도는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배우 데미 무어를 ‘2025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물’로 선정한 미국 연예매체 피플 표지. 출처 피플
나와 똑같은 얼굴은 없다. 그렇기에 남과 다른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에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상적 얼굴이 있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얼굴로 성형 수술을 한다면 아름다움의 본래 가치는 사라진다. 누구나 복제인간처럼 된다면 수술로 만들어진 얼굴을 진짜 잘생긴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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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