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형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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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폭풍에 유럽 경제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지금, ‘신 스틸러’로 주목받는 나라가 있다. 2010년대까지 부채에 허덕이며 ‘유로존의 시한폭탄’으로 치부되던 그리스다.
그리스 경제는 ‘기적의 리바운드(miraculous rebound)’를 보여주고 있다. 유럽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12%까지 치솟은 국가부채는 지난해 150% 수준까지 줄었다. 경제성장률, 실업률, 신용등급 등 경제 지표들도 덩달아 개선되고 있다. “유럽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만큼 빠르게 부채를 줄인 곳은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퇴학 위기에 처했던 문제아가 우등생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부도 맞고서야 개혁 나선 그리스
인접 국가들의 태도도 180도 달라졌다. 독일 정치권은 과거 “조기 은퇴를 즐기는 게으른 그리스인(faule Grieche)”이라며 유독 강한 비판을 쏟아냈다. 최근엔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가 나서 “그리스가 독일이 꿈도 꿀 수 없는 성장을 보여줬다”며 극찬했다. 독일 매체 타게스슈피겔은 ‘독일이 그리스에 배울 수 있는 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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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터널’로 빠져들고 있는 프랑스 재정 위기가 그렇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집권 2기 들어 급증하는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직을 걸고 긴축에 나섰다.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래 세대를 위해 할 일을 하겠다’며 밀어붙였다. 국회 표결 없이 헌법 49조3항을 발동해 대통령 직권으로 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마크롱의 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프랑스인은 많지 않다. 프랑스 여론조사업체 이포프(Ifop)와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은 집권 후 최저 수준인 21%까지 떨어졌다. 높은 세금과 복지 축소 움직임에 분노한 서민들은 거리로 나서고 있다. 2027년 대선을 앞둔 야권은 극좌부터 극우까지 반(反)마크롱 전선으로 뭉치고 있다.
재정 위기 佛, 총리 나흘만 재임명 ‘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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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위기가 정권의 위기로 번지는 프랑스를 보면 한번 늘어난 복지를 줄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게 된다. 정치적 손실을 감내할 지도자가 나오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국민을 설득해 내는 건 더 어렵다. 그리스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채권단의 압박 속에 강제로 수술대에 올랐듯, 개혁은 파산 직전에서야 비로소 가능할 때가 많다.
‘한번 시작하면 망할 때까지 못 멈춘다’는 마약 경고 문구처럼 인공호흡기를 달기 전까진 복지병을 고치기 쉽지 않다. 유럽 핵심 국가들이 국가 부도 후에야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길로 들어선 ‘변방 나라’ 그리스를 참고하고, 나아가 은근히 부러워도 하는 아이러니의 시대다. 우리에게도 지속 가능한 재정 정책을 위한 진중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유근형 파리 특파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