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비자금 ‘뇌물’로 판단… 1조4000억 분할 판결 뒤집혀 대법 “재산분할 다시 심리해야”… 서울고법으로 환송 위자료 20억 원은 확정… 최태원 회장 항고 기각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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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뇌물성 불법자금으로 규정하며 해당 자금이 부부 공동재산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최태원 SK주식회사 회장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1조3808억 원을 지급하라고 한 항소심 판결은 파기환송돼 재검토된다.
16일 대법원은 16일 최 회장과 노 관장 간 이혼소송 상고심 선고에서 반소 재산분할 청구 부분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반면 위자료 20억 원은 최태원 회장 상고를 기각해 노소영 관장에 손을 들어줬다.
이번 소송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먼저 법원에 이혼을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함께 청구하는 맞소송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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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1년경 최태원 회장의 부친 최종현 전 회장에게 300억 원 정도의 금전을 지원했다고 하더라도 이 돈의 출처는 대통령 재직 중 수수한 뇌물로 보인다”면서 “노태우가 뇌물의 일부를 사돈 혹은 자녀 부부에게 지원하고 이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국가의 자금 추적과 추징을 불가능하게 한 행위는 선량한 풍속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고 반사회성·반윤리성·반도덕성이 현저해 법의 보호영역 밖에 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에서도 민법 제746조(불법원인급여)의 입법 취지가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해당 조항은 ‘불법의 원인으로 재산을 급여한 때에는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은 “노소영 관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원한 자금을 직접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돈이 SK그룹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재산분할 몫을 늘려 달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법성을 없애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뇌물이나 비자금처럼 사회질서에 반하는 자금은 어떤 형태로든 법이 보호할 수 없고 그 돈이 기업 성장이나 부부 공동재산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이를 재산분할 산정 과정에서 ‘기여분’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법원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항소심 재판부가 노태우의 금전 지원을 노 관장의 기여로 평가해 재산분할 비율에 반영한 것은 법리를 잘못 해석한 판단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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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에 따르면 최 회장은 혼인관계가 파탄되기 이전인 2012년부터 2018년까지 SK C&C, SK㈜ 등 주식을 친인척과 재단 등에 증여했다. 2014년 한국고등교육재단에 SK C&C 주식 9만1895주, 2018년 최종현학술원에 SK㈜ 주식 20만 주, 같은 해 친인척 18명에게 SK㈜ 주식 329만 주를 증여했으며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에게도 자금을 증여하고 증여세 246억 원을 대납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행위가 단순한 재산 은닉이나 분할 회피 목적이 아니라 SK그룹의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 및 경영활동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최 회장의 재산 처분은 혼인관계 파탄 이전에 이뤄졌고 그룹 경영자로서 기업의 지배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부부공동재산의 유지 또는 가치 증가를 위한 행위로 볼 여지가 있다”면서 “친인척에 대한 증여나 급여 반납도 SK그룹 경영자로서 원활한 경제활동을 위한 것으로 공동재산 형성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대법원은 항소심 재판부가 최 회장이 이미 증여나 기부 등의 형태로 처분해 실제로는 보유하지 않은 재산을 여전히 존재하는 자산으로 간주해 재산분할 대상으로 포함한 것은 법적 근거가 부족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불법 자금 지원을 재산 형성의 기여도로 평가해 분할 비율 산정에 반영한 점 역시 법리 해석의 오류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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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판결은 불법자금이 부부 재산분할의 기여도로 인정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 첫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대법원이 처음으로 “혼인관계가 파탄된 이후 부부 일방이 공동재산 형성과 관련 없이 적극재산을 처분한 경우에만 이를 분할 대상으로 포함할 수 있다”는 법리를 설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대법원 공보관실은 “사회적 타당성이 없는 행위를 한 사람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민법 제746조의 취지를 재확인한 판결”이라며 “정경유착 자금이나 비자금 등 불법원인급여의 사적 이전이 재산분할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은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내져 재산분할 비율과 금액이 다시 산정될 예정이다. 법조계는 이번 판결이 향후 고액 자산가의 이혼 사건뿐 아니라 불법자금의 사적 이전을 둘러싼 분쟁에 기준이 되는 판례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대법원이 공사(公私)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며 불법자금의 사적 보호를 단호히 배제한 판결”이라면서 “이혼소송이지만 사실상 정경유착 자금에 대한 사후 법적 책임을 가른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황소영 기자 fangs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