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히틀러도 본색 드러내기 전에는 중도 실용[송평인의 시사서평]

입력 | 2025-10-12 11:41:00


서적『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

20세기 정치적 악인들의 전기를 읽고 있다. 스탈린 마오쩌둥을 읽다가 아무래도 선거와는 거리가 먼 체제의 사람인 듯해 잠시 히틀러 쪽으로 틀었다. 히틀러는 볼세비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이었다. 뮌헨에서 나치당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를 동원해 바이에른주 정부를 쿠데타로 뒤엎고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을 본떠 베를린으로 진군하려 했다가 실패해 반역죄로 1년 넘게 수감된 전력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총선에서 제1당이 되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는 과정에서 중도 실용을 표방하는 쪽으로 변신했다. 외교적으로도 영국을 기만해 체임벌린 총리로부터 독일은 전쟁에 관심이 없다는 잘못된 판단을 끌어냈다. 그러나 결국 전쟁 야욕을 드러내 세계를 또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밀어넣고 반유대주의의 발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히틀러는 사후에야 자료가 공개된 스탈린이나 지금까지도 자료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 마오쩌둥과 달리 이미 1952년에 영국 역사가 앨런 벌록(Allen Bullock)의 ‘히틀러 :독재의 연구(Hitler :Study in Tyranny)’라는 완성도 높은 전기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 역사가 요아킴 페스트가 1973년 쓴 ‘히틀러’가 1997년 그의 전기로는 최초로 번역돼 나와 읽혔다. 독일과 싸웠던 영미권 역사가가 아니라 독일 역사가가 쓴 히틀러 전기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2000년 히틀러 전기로는 넘어서기 어려운 2권짜리 대작이 영국 역사가 이언 커쇼(Ian Kershaw)에 의해 완성됐다. 1권에는 ‘히틀러 1889~1936 :휘브리스(Hybris)’, 2권에는‘히틀러 1936~1945 :네메시스(Nemesis)’라는 제목이 달렸다. 소련 해체 이후 모스크바 국가문서고에 보관된괴벨스 일기에 대한 연구가 작품에 새로 포함된 이 책은 국내에는 2010년 번역됐다.

내가 이번에 읽은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원제 Adolf Hitler:the Definte Biography)’은 이미 1976년 나왔지만 국내에는 2019년에 와서야 비로소 두 권으로 번역됐다. 퓰러처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존 톨랜드가 1970년대까지 살아있던 히틀러의 주변 인물 200명 이상을 인터뷰하고 관련 자료를 모아 쓴 책으로 히틀러 시대를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장점이 있어 원서가 나온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에서의 쿠데타 실패 이후 10년만인 1933년 총리가 된다. 나치당은 1930년 18%를 득표해 제2당이 되고 1932년 37.3%를 득표해 제1당이 된다. 그는 제1당의 당수로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총리 지명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돌격대(SA)가 저지르는 폭력이나 테러 행위로 인해 나치당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당 없이는 정부가 구성될 수 없었다. 이런 교착 상태를 가장 크게 우려한 것은 무엇보다 재계 지도자들이었다. 나중에 독일제국은행 총재가 되는 경제관료 햘마르 샤흐트와 재벌인 지멘스 티센 푀글러 등 39명의 저명한 재계 지도자들은 대통령에게 공동 서한을 보내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도록 청원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사회주의는 겉모양일 뿐이고 정권을 잡으면 자본주의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히틀러식 사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의 도구가 됐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수개월을 버틴 끝에 결국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히틀러의 총리 임명 소식에 진보주의자들은 공포에 떨었으나 일반 독일인들은 새 정부가 혼란을 거듭한 지난 의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젊은 이상주의자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원통한 애국주의자들, 인종주의자들이 쾌재를 불렀다.

힌데부르크 대통령의 설득에는 전임 총리인 파펜이 기울인 노력이 컸다. 파펜으로 대표되는 융커 계급은 권위주의 통제를 부활하기 위해 히틀러를 사왔다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당시 주요 신문의 사설도 히틀러의 총리 임명이 가져온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일간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히틀러가 임명된날 ‘나치당이 2명뿐인 내각 구성을 보면 히틀러는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이틀 뒤에는 ‘정부가 히틀러가 아닌 후겐베르크(연정을 구성한 중앙당당수) 중심으로 돌아가는게 너무도 명백하다’고 언급했다.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자신의 의도를 숨겼다. 그는 유권자를 향한 라디오 연설에서 유대인 관련 계획에 대해서는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일반 시민들이 놀랄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연설하는 시각에 샤흐트 독일제국은행총재는 베를린 주재 미국 부대사와 식사하면서 자신이 지도자의 법적인 재무 및 경제 자문관이라고 밝히고 나치당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은 선동적인 변화를 기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히틀러는 가장 먼저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사용해 정치 집회를 통제하고 언론을 제한하는 법령을 추진했다. 마침 네덜란드 출신의 24세 공산주의자 마리누스 반 데어 뤼베가 의사당을 방화한 사건이 일어났다. 히틀러는 이를 공산당 봉기의 시작으로 여겼다. 그는 독일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며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초월하고 연방정부가 주 정부를 통제하는 법령에 대한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냈다. 이 법령은 군사 독재 시 최고사령관에 부여하는 모든 권한을 내각에 줬다. 표면적으로는 이런 권한 부여에 불길한 전조가 없어 보였다. 내각에는 여전히 비(非)나치당 소속 장관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지도 않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안된 긴급조치는 결국 권력 전체를 요구하는 히틀러에게는 도약대가 됐다.

독일 사회 모든 계층의 화해(요새말로는 국민통합)는 히틀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는 첫 의회 연설에서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를 존중한다고 다짐했고 노동자만이 아니라 농민과 중산층한데도 지원을 약속했다. 실업을 끝내고 외국과 평화를 증진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수권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권법은 국내에서 모든 것을 우선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이 법이 온건한 것처럼 들리게 만들었고 매우 중요한 조치를 수행하는 한도에서만 사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의회에서 수권법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고 441대 94표로 통과됐다. 법안 통과에 필요한 전체 투표의 3분의 2를 크게 넘는 표차였다.

수권법에 따라 모든 유대인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직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령을 실시했다. 학교 과밀제한법을 만들어 고등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유대인의 수를 축소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났으나 일부 유대인들은 반유대인 조치가 그들을 대상으로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들은 히틀러의 진짜 목표는 동쪽으로부터 유입되는 유대인이라고생각했다. 공산당이 방화 사건으로 불법화된데 이어 사회민주당도 나라에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비합법화됐다. 독일인민당도 해산됐다. 히틀러는 1당 체제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1당 국가 체제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히틀러는 의회에 투표해줄 것을 요구했고 아무런 반대없이 통과됐다.

1년전만 해도 길거리 깡패였던 히틀러가 졸지에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극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을 따라 크든 작든 히틀러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서구의 몰락을 쓴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히틀러와 1시간 반 동안 만난 뒤 히틀러가 큰 그릇은 아니지만 품위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고 떠났다.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히틀러가 좋아하는 작곡가는아니었음에도 더욱 적극적이어서 베를린에서 ‘장미의 기사’를 연주할 때 중간 휴식 시간에 히틀러가 자신을 불러준 것에 행복감을 표시했다. 카롤릭 대주교인 루트비히카스는 교황과 알현한 뒤 ‘히틀러는 배를 어디로 끌고 갈지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 ‘영국은 바다를 지배하고 독일은 유럽 대륙을 통제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보루가 된다’는 식으로 영국을 구워삶았다. 재무장을 위해 국제연맹을 탈퇴했을 때 영국은 비난하기보다 동정적으로 나왔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학생들에게 ‘지도자가 국제연맹을 떠난 것은 맹목적인 고집이나 폭력을위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 국민이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전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명확히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영국 총리가 되는 이든은 외무장관일 때 히틀러의 인격은 부정적으로 봤지만 원고도 없이 회담을 끌어가는 히틀러의 방식에는 놀라움을 표했다. ‘데일리 메일’의 로더미어경은 자신의 신문을 통해 독일에 유리한 그림을 그려줬다. 영국이 독일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리자 히틀러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라인란트를 전격적으로 재점령했다. 히틀러는 의회를 해산하고 라인란트 현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이번에는 히틀러가 무력 사용없이도 98%의 표를 얻었다.

히틀러는 라인란트 진주에 성공한 후 국내 문제를 희생하고서라도 외교 정책으로 승기를 잡는데 몰두했다. 영국인들은 교활한 지도자를 다루는데 계속 미숙함을 보였다. 그들은 히틀러를 이해시켜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유화적인 대화와 애매한 협정 제안으로 자신을 계속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영국의 저명인사들이 선의와 희망의 메시지를 들고 줄지어 독일을 찾았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베르사유조약 체결 당사자중 1명인 전직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함께 독일을 방문하고 나서 히틀러가 평화 의도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히틀러는 로이드 조지에게 “양국은 같은 인종으로 상호 이해가 필수적이다. 문명에 대한 위협은 볼세비즘이다. 이는 광적인 집착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협이다”며 양국의 일치된 노력을 촉구했다. 로이도 조지는 뉘른베르크의 나치당 창건 행사에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그는 독일에 다녀온 뒤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기고한 글에서 히틀러 혼자 독일을 수렁에서 구해냈다고 썼다. 새로 총리가 되는 네빌 체임벌린만 바보같이 속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제1차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를 점령함으로써 독일의 동쪽과 남쪽 측면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체임벌린은 유화 정책만이 유럽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위협했을 때도 독일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됐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는 슈테덴 지방에 자결권을 주는 조건으로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히틀러에게서 받아냈다며 협상의 성공을 자축했으나 결국 히틀러는 체코를 점령했다. 유럽의 평화는 깨졌고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했다.



송평인 칼럼니스트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