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사진 No. 131
● 국민의힘 의원들 노트북에 붙은 피켓 “가짜 뉴스 공장 민주당”
이번 주 초였던 9월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여야 간 고성이 오가는 공방전으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추미애 법사위원장이 국민의힘 의원들이 노트북에 붙인 종이의 문구 ‘정치 공작, 가짜뉴스 공장 민주당’을 문제 삼으며 “이렇게 하는 게 윤석열 오빠한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비꼬았고, 이에 나경원 의원이 “여기서 윤석열 얘기가 왜 나오냐”고 맞섰습니다. 원래 국민의힘 의원들은 노트북에 나란히 붙은 피켓 문구가 화면과 사진으로 국민들에게 전달되길 바랬을지 모르지만 실제 보도된 것은 서로 고함을 치고 있는 추미애 의원과 나경원 의원의 투샷이었습니다.
국회 풍경에 한숨을 내쉬는 국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검찰개혁 입법청문회에서 퇴장 명령을 한 추미애 위원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2025.9.22/뉴스1
국회에서 의원들이 노트북 겉에 구호를 써 붙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 말할 기회도 많고 채널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굳이 피켓으로 항의하는 모습은, 한 발 떨어져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면입니다.
● 피켓과 피케팅의 기원
‘피켓(picket)’은 원래 경계병을 의미하는 군사용 용어에서 시작됐습니다. 전투 중인 군대 앞에 배치되어 적의 접근을 막는 병력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배치된 파업 중인 노동자’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피케팅은 피켓을 들고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2000년대 들어 헌법재판소가 1인 시위를 합법으로 인정하면서, 피켓은 시민들의 일상적인 정치 표현 수단으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국회 앞이나 정부청사 앞에서 교대로 피켓을 들고 선 이들의 모습은 서울의 흔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 국회 안으로 들어온 피켓
그러면 피켓이 국회 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을 중심으로 유추해보았습니다.
14대 총선 공천탈락설이 나도는 정웅 의원 지역구민들이 27일 피켓을 든채 침묵시위. 1992년 1월 27일. 동아일보 DB.
2001년에는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이남주 사무총장이 국회 앞에서 ‘빈껍데기 부패방지법 속빈강정 돈세탁 방조법’이라 적힌 피켓으로 48시간 철야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정치권 바깥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피켓으로 표현된 사례였습니다.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소속 이남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이 국회앞에서 `빈껍데기 부패방치법 속빈강정 돈세탁 방조법`이란 피켓으로 48시간동안 철야로 릴레이 1인시위를 벌이고있다./2001년 4월 25일.동아일보 DB.
피켓이 국회 본회의장 안으로 들어 온 것은 2004년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야 합의에 항의하며 피켓 시위를 벌였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이 장면을 보도했습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야 합의에 항의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김원기 국회의장이 본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2004년 12월 31일. 동아일보 DB
이후 2009년 자유선진당 임영호 의원이 ‘세종시 특별법 제정하라’는 피켓을 들며 항의하는 등, 피켓은 국회 내 익숙한 장면이 됐습니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의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자유선진당 임영호 의원이 ‘세종시특별법 제정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2009년 7월 27일. 동아일보 DB
● 급기야 국회의원 노트북에 붙기 시작한 피켓
국회의원들이 노트북에 문구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즈음입니다. 당시 국회 교과위 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반값 등록금 약속 지켜라’라는 문구를, 여당 의원들은 ‘민주당 정권 10년 동안 등록금 2배 인상 사과하라’는 문구를 노트북에 붙였습니다. 서로 다른 문구를 맞붙이며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은 여야간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기자들에겐 쉬운 취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관행이 국회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13일 국회에서 열린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야당의원들의 노트북에 ‘반값 등록금 약속지켜라’는 문구를 붙여 놓고 회의를 하고 있다. / 2011년 6월 13일. 동아일보 DB
13일 국회 교과위 상임위원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노트북에 ‘민주당 정권 10년동안 등록금 2배 인상 사과하라’는 문구가 적혀 여야간 문구 설전을 벌이며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 같은 날. 동아일보 DB
이후 2015년 교육부 종합국감, 2017년 김상곤 교육부 장관 인사청문회 등에서도 피켓과 문구 붙이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국회에서 열린 교육부 종합국감에서 자료제출 문제로 여야간 대립하여 파행을 격고 있다. 2015년 10월 8일. 동아일보 DB.
● 국회의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피켓 시위
그런데 이런 관행이 지금도 적절한 방식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피켓은 원래 발언권이 없고 힘이 약한 사람들이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발언권을 가진 의원들이 피켓을 들고 있습니다.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김상곤 교육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김 후보자의 자질문제를 거론하며 항의하고 있다. 2017년 6월 29일. 동아일보 DB.
●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을 못 따라오는 정치 문화
시대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은, 낡은 시위 방식은 이제 역사 속으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 이번 주였습니다. 물론, 상임위 위원장 자리를 차지한 6선의 여당 국회의원이 상대방 당을 향해 모멸감을 주는 표현을 하는 것이 국민들 다수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중진 의원들의 막말과 구태는 조용히 지지율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고 해서 그게 마냥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무거운 경고를 하면서 누가 먼저 선진화된 정치를 할지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보태 주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