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의 결말은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에서 속이 후련해지는 까닭은 우리 마음의 양심이나 정의감에 들어맞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종교의 규율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선과 악으로 엄격하게 정한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십계명이 있고 불교에서는 자비와 살생 금지의 계율이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악이며, 타인을 목적으로 존중하는 것은 선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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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선과 악의 기원을 독수리(위쪽 사진)와 양에 비유해 설명했다. 니체는 양을 사냥해 생존을 이어가는 독수리를 악한 존재로 인식하는 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양의 시점에서 강자를 악으로 낙인찍어 약자를 선한 존재로 포장하려는 자기기만이라고 분석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여기서 윤리적 주체라는 개념이 상상력에 의해 덧붙여진다. 니체는 주체와 작용을 분리한다. 중립적인 존재인 주체는 행위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책임을 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독수리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양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때문에 독수리는 양을 해치는 경우 윤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선과 악이라는 잣대로 독수리에게 윤리적인 구속을 덧씌우면 독수리가 양을 잡아먹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니체는 독수리가 양을 낚아채 가거나 해치지 않기 위해 고안된 거짓말을 ‘화폐 위조’에 비유해 비판한다. 그는 도덕의 이상이 어떻게 제조되는지 묻는다. 양들은 복수심에 불타 간계(奸計)를 발휘해 더 이상 독수리와 같은 악한 존재가 아닌 선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겉과는 달리 마음속에는 강한 독수리를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과 ‘복수심’이 가득 차 있다. 양은 독수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선’으로 포장한다. 공격하지 못하는 행위가 선한 것이 되면서 자신이 마치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주의자, 정의로운 자인 척한다. 양이 생각하는 ‘선한 존재’는 ‘능욕하지 않는 자’,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공정한 자이다. 따라서 인내, 겸손, 공정은 약자인 자신의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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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상 두 개의 대립되는 가치 평가는 ‘좋음과 나쁨’ 그리고 ‘선과 악’이다. 니체는 책의 제목과 관련해 ‘선과 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넘고자 하였을 뿐 ‘좋음과 나쁨’ 자체를 없애려는 의도는 없다.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타인을 악으로 규정하려는 우리 안의 원한과 증오다. 강한 자를 악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자신을 선한 약자로 포장하려는 자기기만을 경계한 것이다. 독수리가 악하다는 판단은 ‘양’의 상상일 뿐이다. 이처럼 악은 실재하지 않는 ‘뇌피셜’인 경우가 많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