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디자인은 공산품이라도 우리 일상에 자연히 스며들게 해 디자인 선언 뒤 경쟁력 높인 삼성… 대량생산 디자인 구축한 현대차 집은 지을 때부터 ‘공산품 집합소’… 디자인-품질 균형이 삶의 질 높여
우리가 가진 물건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대량생산된 제품이라도 우리 생활을 아름답게 한다. 서울시립대 디자인학과 김성곤 교수 부부가 일상에서 쓰는 공산품을 조명한 전시 ‘공산품 미학’을 보면 이를 느낄 수 있다. 위쪽 사진부터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와인잔과 찻잔 세트, 조르제토 주자로가 디자인한 카메라와 자동차, 전시 ‘공산품 미학’의 모습. 김성곤 교수 제공
우리는 매일 수많은 물건을 접하며 생활한다. 휴대전화, 신용카드, 가방, 지갑, 신발, 옷 등 몸에 지니는 물건뿐 아니라 TV, 냉장고, 소파, 식탁, 조명 등 다양한 물건을 집에서 사용한다. 이런 물건들은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제작된 공예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공산품이다. 내가 가진 물건의 아름다움은 내 생활을 아름답게 한다. 또 사람들의 옷차림을 비롯해서 자동차, 가로등, 보도블록, 표지판, 그리고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하지만 버스나 지하철역의 카드 단말기까지, 공산품들은 도시의 풍경을 하나하나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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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선두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공산품의 디자인적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과거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라고 지적하며, 200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자인 선언’을 통해 “삼성의 차세대 핵심 전략은 바로 디자인”이라고 선언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인물이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이다. 모리슨은 삼성과 함께 휴대전화, 냉장고, 오븐 등을 디자인하며 삼성전자의 디자인 경쟁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모리슨의 디자인은 동양적인 철학과 결을 같이한다. 그는 평범한 것들이 과하게 디자인된 대다수의 것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닫고 ‘슈퍼 노멀(super norma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슈퍼 노멀은 평범한 일상 속 숨겨진 감동을 발견하는 디자인 태도이자 방법론이다. 모리슨은 프랑스 파리의 한 고물상에서 뭉뚝한 앤티크 와인잔을 발견해 몇 년간 사용해 보면서 그 소박함이 식탁에 근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주변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제 본분을 다하는 물건들을 디자인하게 됐다. 그는 “알맞은 가격에 훌륭한 기능과 분위기를 갖춘 물건을 만들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했다.
2024년 세계 자동차 판매량 3위를 기록한 현대자동차 역시 창립 초기부터 디자인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삼았다.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자체 제작한 ‘포니’를 비롯해 ‘스텔라’ ‘쏘나타’ 등 초기 모델을 디자인한 이는 ‘자동차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르제토 주자로다. 1973년 고 정주영 회장은 주자로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토리노를 직접 찾았고, 대량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자동차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 결과 탄생한 모델이 바로 포니다. 주자로는 “자동차는 수만 개의 부품으로 이뤄져 있고, 이를 하나로 묶어내는 디자인을 한다는 건 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며 공산품으로서 자동차의 가치를 강조했다.
집은 공산품의 집합체다. 구조를 담당하는 철골, 철근, 목재, 합판, 벽돌, 창문, 손잡이, 세면대, 싱크대, 욕조, 에어컨, 타일, 석재, 유리 등 거의 모든 건축 자재가 공산품이다. 건축물이 완공된 이후에도 가구, 조명, TV, 공기청정기, 청소기, 그릇, 커튼 등 수많은 공산품이 집을 채운다. 이런 의미에서 집은 공산품의 집합소이자 산업의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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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품에는 반도체나 자동차처럼 고도의 기술력과 관련 산업의 뒷받침이 필요한 분야도 있지만 연필, 가위, 음료 용기, 청소용품, 그릇과 같이 사용자와 생활환경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디자인 태도가 더 중요한 제품도 무수히 많다. 훌륭한 공산품은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돼 산업을 발전시키고, 우리의 생활을 아름답게 만든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