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완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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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12·3 비상계엄을 겪으며 유명해진 책이 하버드대 교수들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난다.” 중남미 동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3년 전 대선 때 윤 전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이들 중에서도 그 선택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48%대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계엄이 잘못됐다며 탄핵에 찬성한 여론이 60∼70%에 달했다. 이들에겐 민주주의가 투표장에서 무너진다는 말이 더 와닿을지 모르겠다.
대통령 선출도 심판도 ‘국민의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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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전 대통령을 국정 최고 책임자에 오르게 한 것이 ‘국민의 의사’였듯, 윤 전 대통령을 심판한 것도 ‘국민의 의사’였다. 윤 전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고 위헌적 계엄 폭주로 내달렸을 때, 국회가 이를 멈춰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외면한 ‘국민의 의사’가 국회를 야당 과반으로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선거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주권을 국민의 대표에게 위임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도무지 실감되지 않던 이들도 계엄의 밤엔 선거로 드러난 서릿발 같은 주권으로 지도자의 민주주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증거를 목격한 셈이다. 민주주의가 투표장에서 붕괴한다는 하버드대 교수들의 지적은 적어도 이 대목에선 틀렸다.
유권자는 ‘민주주의 경기장’의 심판
물론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정작 선거가 끝난 뒤 공복이 아니라 주인처럼 행세하고 국가권력과 의회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때면, 시민들이 자유로운 건 오직 선거 때뿐이고 선거가 끝나는 순간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는 루소의 말이 현실과 더 가깝게 들릴지 모른다. 상대를 존중하는 관용, 권한을 남용하지 않으려는 절제,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지금의 정치를 보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느 한쪽은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건지 비전이 흐릿하고, 어느 한쪽은 행여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독식할 걱정이 들면, 이들에게 과연 내 주권을 맡겨야 할지 선뜻 투표장에 갈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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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