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자전적 기록으로는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나온 ‘이재명의 굽은 팔’이 있다. 저자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자전적 기록으로 볼 수 있게 쓰여져 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는 이 후보의 이름이 저자로 들어간 ‘이재명의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가 나왔고 또 이 후보 본인의 이름으로 쓴 웹자서전이 인터넷에 게시됐다.
‘이재명의 굽은 팔’에는 이 후보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청구대를 중퇴한 후 태백으로 가서 탄광 관리자 노릇도 하고 잠시 교사도 했다고 돼 있다. 이 후보의 웹자서전에는 한가지가 더 추가돼 순경까지 했다고 돼 있다.
청구대는 나중에 영남대로 통합된 대학이다. 이 대학에 야간 과정이 있었다. 이 후보는 아버지가 중퇴이긴 하지만 고학으로 대학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고학으로 다닌다면 야간에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중퇴다. 그걸 고려하지 않으면 ‘대학 공부를 했던 사람’이란 표현이 과도한 의미로 받아들여져 이 후보 아버지의 삶이 이해불가능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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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성남시장이 서울 서대문구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홀에서 열린 ‘’이재명의 굽은 팔‘’ 출판 기념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재명 소년공 삶을 결정한 건 가난보다 아버지
아무튼 이 후보의 아버지는 탄광 관리자도 교사도 순경도 다 포기하고 안동의 산골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이 후보는 웹자서전에서 아버지는 농사일도 할 줄 몰랐고 고향에 땅이라고는 조금만 밭떼기뿐이었지만 효자였기 때문에 부모를 모시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썼다. 이미 결혼하고 자식이 딸려있는 상황에서 먹고살 길이 불투명한데도 고향에 돌아간 이유가 그저 효자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아무래도 설득력있게 와닿지 않는다.
이 후보의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온 결과가 파국으로 끝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후보의 아버지는 농사일이라는 본업보다는 마을 사람들의 호적 신고 대행이나 작명(作名) 등 돈이 안 되는 일을 주로 하다가 ‘도리짓고땡’이라는 도박에 빠져 조금만 밭떼기마저 날려버리고 고향을 떠났다. 이 후보의 아버지가 이후 성남으로 이주해 한 일은 상대원 시장의 청소부였다. 탄광 관리자와 교사·순경직까지 했던 사람의 귀결로는 크게 동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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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보의 가족은 전 구성원이 다 돈벌이에 나선 덕분인지 집 장만이 빨랐다. 이 후보가 소년 시절부터 노동에 내몰린 것은 집안의 가난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태백에서 좋은 자리 다 버리고 고향으로 가 한량 노릇을 하다가 성남으로 이주해서는 돌연 돈벌이에 집착해 전 가족 구성원을 돈벌이에 내몬 특이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후보의 웹자서전에는 그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봄가을이면 논밭에서 벼나 보리 이삭을 한 되씩 주워오라 했다. 아무리 주워도 쭉정이 한홉 채우기조차 버거웠다. 아이들은 집에서 한 됫박씩 (쌀을) 퍼오곤 했는데 나는 몸으로 때웠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도 지금은 대구로 편입된 경북 경산군 반야월이란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봄과 가을에 1주일씩 방학을 주고 벼나 보리 이삭을 주워오도록 한 똑같은 경험을 했다. 쌀 생산량을 늘리는 게 중요하던 시절이라 이삭 하나라도 허투루 버리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동원한 것이다. 아침부터 논밭으로 나가 타작하는 곳 근처에서 이삭을 주웠다. 학교에서 할당한 양을 채우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주으면 이삭으로 한 가마니 가까이 채울 수 있었다(그것을 타작을 하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어울려 다니며 노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많이 줍지 못한 때도 있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야단 맞을 각오를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쌀을 퍼갈 정도로 압박을 받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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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방 들통날 지어낸 이야기들
‘이 후보의 굽은 팔’에서는 이 후보가 대학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꼽는 대목이 있다. “대학 2학년 때였을 게다. 아니다. 대학 3학년 때였을 게다. 아니다. 대학 4학년 때였을 게다. ‘태백산맥’은 그렇게 해를 거듭하며 출판됐다. 새로 찍혀 나올 때마다 나는 ’태백산맥‘을 품었다. 그때마다 내 가슴에서 산맥 하나가 불쑥불쑥 자라났다. 광주 항쟁과 더불어 태백산맥은 내 삶을 바꾸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후보는 82학번이고 나는 83학번이다.’태백산맥‘이 이 후보가 대학 2학년 때 처음 나왔으면 내가 대학 1학년 때일텐데 그런 기억이 없다. 나는 그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관심을 갖고 보긴 했다. ’태백산맥‘이 잡지에 연재된 것은 1983년부터이긴 하지만 책으로 엮여 나온 것은 1986년부터다. 이 후보가 대학생일 때는 그 책이 나오지도 않았다.
이 후보는 대학 시절 읽은 태백산맥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는 얘기를 지어 내서라도 ‘의식’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만 그에게 시대에 대한 고민은 현실적 이익보다 후순위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운동권이든 아니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자고 공부하는 게 옳으냐는 문제로 고민했다. 이 후보처럼 일단 사시에 합격하고 그 후에 공익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어찌 보면 단순한 해답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법대생이 대학에서 사시 준비를 하는 건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고 어렵게 자란 만큼 안정적인 생활기반부터 확보하려고 한 태도 역시 이해하고도 남는다. 다만 그는 다른 소년공들과는 달리 대학을 다니게 돼 스스로에 대한 깊은 윤리적 성찰을 해볼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잡지 못한 듯하다. 이후 공인으로서의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고 그에 대한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송평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