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선시대 제주 사람들에게 전복을 따서 조정에 바치는 일은 고통이었다. 전복 채취는 생계를 위한 노동을 넘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제주목사였던 이예연과 기건은 전복 따는 해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차마 전복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전복 캐는 수고로움을 생각하니 어찌 전복 먹을 생각이 나겠는가”라는 정조의 말도 홍재전서에 기록돼 있다.
전복 잡는 물질은 힘들었고, 전복을 공납하는 일은 괴로웠다. 제주목사 이형상이 “잠녀(해녀)는 1년 내내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 목자(牧者)의 10배나 됩니다.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하려 함은 당연한 이치”라는 상소문을 올렸을 정도다. 노쇠하거나 병약한 해녀는 다른 해녀에게서 전복을 사서 바쳤다고 하니 전복 공납은 폭압적인 족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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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전복 잡는 남성 포작인과 해녀를 주제로 강연하며 전복 채취의 고단함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한 청중이 질문했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전복을 쉽게 잡던데 그 정도로 힘든 일인지 잘 와닿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물음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답변했다. 우선, 1970년 수산진흥원에서 최초로 전복 알의 인공 부화에 성공해 전복 치패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남해와 동해를 중심으로 전복 치패 방류 사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 결과 조선시대보다 개체 수가 증가해 전복 채취가 쉬워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두 번째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뒀다. 언젠가 TV를 시청하는데 한 연예인이 바닷가 조수 웅덩이에서 손바닥 정도 크기의 전복 7, 8마리를 건져냈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참전복(북방전복)은 주로 수심 5m 아래서 서식한다. 간혹 수심이 얕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조수 웅덩이에 씨알 굵은 전복이 무더기로 서식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또 화면에 비친 전복 껍데기의 외형을 봤을 때 자연산 전복처럼 보이지 않았다. 재미를 위해 인위적인 환경을 조성했을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새 전복 가격이 작지 않게 떨어졌지만, 전복의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배어 있는 건 사실이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