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일이다. 할머니인가 할아버지 생신이 가까워져서 삼촌, 고모 등이 모여 이번 부모님 생신에 뭘 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칠순 같은 특별한 생신이었고, 그래서 잔치를 할까, 여행을 보내드릴까 등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뭘 이야기해도 싫다고만 하고 고개를 저었다. 여러 옵션을 제시하는데도 싫다고만 하는 부모님 때문에 자식들은 지쳤다. 결국 “그냥 그 돈을 드릴 테니 맘대로 하시라”라고 내뱉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고만 하니 짜증이 나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에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 삼촌, 고모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았다. 현금을 받는 것이었다. 삼촌, 고모들은 돈을 모아서 드리기로 했다. 물론 돈을 드리는 것만으로 생신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따로 식사도 했지만, 어쨌든 가장 큰 건 현금 선물이었다.
이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돈을 원했지만, 자식들에게 돈을 달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여행을 보내달라” “잔치를 하자”는 말은 할 수 있어도, 돈을 달라는 말은 자식임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설령 자식들이라 해도 대놓고 돈을 달라는 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반면 자식들은 생신 이벤트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지만 돈을 드린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다. 중요한 생신이라면 돈 이외에 다른 뭔가를 해야 하지, 그냥 돈만 드리고 끝나면 못된 불효자식이 된다. 사람들은 현금 100만 원과 100만 원 가치가 있는 물건을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돈이 사용하기에 더 편하다는 문제가 아니다. “돈을 달라”는 말, 그리고 “돈만 주면 된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돈에는 보통 물건과는 다른 어떤 도덕적 가치가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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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비슷한 가치의 물건보다 사람의 도덕성, 정의감을 더 자극한다. [GETTYIMAGES]
행동경제학자로 유명한 댄 애리얼리가 수행한 실험 가운데 사람들이 돈과 물건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있다. 연구팀은 미국 대학 기숙사 내 학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냉장고에 콜라 캔 6개와 1달러짜리 지폐 6개를 넣어뒀다. 이때 콜라 캔 한 개 가격은 1달러보다 조금 낮기는 했지만 둘의 가치는 거의 동일했다. 그렇게 공동 냉장고에 넣어두고 3일이 지났을 때 콜라 캔과 1달러가 어느 정도 사라졌는지를 살펴보는 실험이었다.
다른 사람의 것은 건드리지 않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공동 냉장고에 뭔가가 들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사람 것이긴 해도 공동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 등은 별 죄책감 없이 마시곤 한다. 그러면 이때 기숙사 학생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3일 후 공동 냉장고를 확인하자 콜라 6캔은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1달러짜리 6개는 모두 남아 있었다. 기숙사 학생들은 공동 냉장고에 있는 콜라는 그냥 마셔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은 건드려선 안 된다고 봤다.
이 실험이 시사하는 바를 살펴보자. 첫째, 사람들은 돈과 돈 이외의 물건을 다르게 생각한다. 어느 게 더 가치가 높은가라는 가치 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은 싼 건 가져가도 된다거나, 비싼 건 가져가선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한 게 아니다. 또한 “비싼 걸 가져가는 게 이익이니 비싼 걸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둘의 가치는 동일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콜라는 가져가도 1달러는 가져가지 않았다. 그 둘을 1달러 가치의 동일한 물건으로 보지 않았다. 1달러 가치의 콜라와 1달러 지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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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돈에는 어떤 도덕적 가치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도덕 가치가 있다. 그런데 기숙사에 있는 공동 냉장고의 경우, 그런 도덕 가치에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건드리는 이들이 있다. 콜라 캔은 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돈은 건드리지 않았다. 학생들은 콜라 캔 정도는 가져가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돈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봤다. 돈에는 좀 더 엄격한 도덕적 가치가 적용되는 것이다. 선물은 받을 수 있지만 돈은 받으면 안 된다는 사회 관습이 생긴 것도 이렇게 돈에는 뭔가 다른 도덕적 가치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돈에는 그 사용가치에 더해 어떤 도덕적 가치가 포함돼 있다.
돈에 따라 사람들의 도덕적 행동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유명한 연구가 있다. 2019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분실된 지갑 찾아주기’ 연구다. 이 연구는 미국 미시간대, 유타대, 스위스 취리히대의 공동연구로 진행됐다. 전 세계 40개국 335개 도시에서 1만7003개의 분실 지갑을 신고하고, 이 지갑이 주인에게 돌아오는 정도를 조사했다. 은행, 지하철역, 문화센터, 박물관 등의 직원에게 누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뒤 지갑을 건네줬다. 그 지갑에는 현지인인 지갑 주인의 이메일 등 연락처가 있었고, 그래서 돌려주려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돌려줄 수 있었다. 이때 과연 지갑을 습득한 사람이 그 지갑을 주인에게 연락해서 돌려줄 것이냐가 문제였다.
지갑은 현금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였다. 연구진은 현금이 있는 지갑은 돌아오지 않고, 현금이 없는 지갑이 더 많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금은 자기가 그냥 가질 수 있기에 현금만 챙기고 지갑은 돌려보내지 않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현금이 없는 지갑보다 현금이 있는 지갑의 회수율이 더 높았다. 사람들은 지갑에 현금이 있을 때 더 적극적으로 지갑을 돌려주려 했다.
예상 외 결과에 연구진은 이번에는 지갑 속 현금 액수를 높여봤다. 처음에는 13.45달러(약 1만8500원) 현금만 넣었는데, 이번에는 94.15달러(약 13만 원) 현금을 넣어둔 것이다. 그런데 현금이 증가하자 회수율이 더 높아졌다. 사람들은 지갑에 현금이 많으면 지갑을 더 돌려주려고 노력했다. 이 연구는 국제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그래서 국가마다 결과가 달랐다. 스위스에서는 지갑에 돈이 없는 경우 73%가 반환 의사를 표했고, 지갑에 돈이 있는 경우에는 79%가 반환 이메일을 보냈다. 중국에서는 돈이 없는 경우 7%만 연락했고, 돈이 있는 경우에는 21%가 연락했다. 각국마다 이런 비율 차이는 있지만, 지갑에 돈이 있을 때 연락하는 비율이 증가한 점은 동일했다. 지갑에 13만 원을 넣어둔 후속 연구는 폴란드, 영국, 미국에서만 이뤄졌다. 이 3개국에서 지갑에 돈이 없는 경우에는 46%, 1만8500원이 들어 있는 경우에는 62%, 13만 원이 들어 있는 경우에는 72%가 반환 연락을 했다. 돈이 많을수록 지갑을 돌려주려는 노력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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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을 자극하는 돈
셋째, 돈은 사람의 도덕성을 자극한다. 처음 지갑에 넣어둔 1만8500원은 그리 큰돈이 아니다. 이 돈이 없다고 지갑 주인이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테고, 이 정도의 돈을 자기가 챙긴다고 해서 큰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1만8500원이 지갑에 있을 때 지갑을 돌려주려는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1만8500원이 큰돈이어서가 아니다. 적은 돈이라도 그 돈을 자기가 챙긴다는 데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다. 적은 돈이지만 돈을 잃어버린 사람을 고려하는 공감대도 증가했다. 돈이 없는 지갑은 그냥 무시할 수 있어도, 돈이 있는 지갑은 무시할 수 없다. 단지 1만8500원으로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정의감과 도덕심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돈 액수가 커지면 그런 정의감과 도덕심도 증가한다. 13만 원이 든 지갑을 70% 넘는 사람이 돌려주려 한 사실은 이것 말고는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돈은 단순히 물질적 수단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도덕적 가치가 들어 있다. 적은 돈이라 해도 사람의 도덕적 가치를 건드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행동이 변화된다. 돈을 그냥 사용가치, 교환가치로만 보고 나눠줄 때 문제가 발생하는 건 이 때문이다. 돈은 도덕적 감정과 연관된다. 이 점이 여느 물건들과는 다른 돈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49호에 실렸습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