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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구조대원 “가족 흐느낌 아직도 귓가에”

입력 | 2024-04-15 03:00:00

10년前 그날에 사는 구조대원-어민
70일간 팽목항서 수습 돕기도
“일상회복 뒤에도 마음의 상처 남아”




“실종자 가족 천막에서 들리던 흐느낌이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아요.”

11일 전남 장흥군 전남소방본부에서 만난 이민석 소방행정팀장(52·소방령·사진)은 10년 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팀장은 2014년 4월 16일 참사 당시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가장 먼저 도착한 119구조대원 중 한 명이다.

그는 참사 3, 4시간 후 팽목항에 도착한 단원고 학생들을 보며 ‘큰일이 났구나’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세월호 승객 인원보다 구조된 사람이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흠뻑 젖은 채 추위에 떠는 학생의 손을 잡아 짐배에서 내려주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그 길로 이 팀장은 70일간 버스 등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팽목항에 머무르며 구조와 실종자 수습을 도맡았다.

이 팀장의 기억은 10년 전 그날에 못 박혀 있다. 특히 한 학생이 자기 생일에 차가운 바다에서 수습된 기억은 이 팀장의 29년 구조대원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다. 이 팀장은 “희생자 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함께 현장을 지켰던 박태진 전남소방본부 소방위도 세월호 참사 직후 단원고 희생 학생 누나가 “(동생의) 휴대전화 신호가 잡힌다. 빨리 찾아달라”고 요청했던 기억이 가슴 저리게 남아 있다. 유가족들이 식사하면서 울음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도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박 소방위는 “세월호 참사가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참사 당시 어선 36척을 타고 구조에 참여한 진도군 조도면 어민들도 여전히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었는데’라는 탄식 속에 살고 있었다. 박종온 진도군 번영회장은 “일상을 회복한 지금도 마음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광희 진도군 수산단체연합회장은 “어민 모두 가급적 그날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어민들은 세월호 조업 피해 보상이 부실했던 점도 상처로 간직하고 있었다. 김영서 전 진도군 통발협회장(67)은 “피해 보상의 적절성보다도 정부의 미흡한 대처가 상처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편 팽목항 4·16기억공간 조성에 대해 진도군과 시민단체 간에 상생 방안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팽목항의 컨테이너 임시 분향소가 철거되고 표지석 등을 설치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