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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양, 미술관에 작업실 차리고 4달 간 그림 그리는 사연 [영감 한 스푼]

입력 | 2024-01-05 10:00:00


10년 전부터 그림을 그려 온 배우 박신양 씨. 경기 평택시의 mM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고, 1층 전시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 ‘영감 한 스푼’은 처음으로 미술관 초대 기획전을 열고, 자신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철학자 김동훈과 함께 설명한 책 ‘제4의 벽’(민음사)를 최근 펴낸 배우 박신양 씨 인터뷰를 자세히 소개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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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가면을 전 국민이 잘 알고 있고, 모두가 나를 그 가면으로 대한다면 어떨까요? 진짜 ‘나’의 자리가 없어지며 숨 막힌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명품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박신양 씨를 만났습니다. 10년 전부터 그림을 그렸다는 그가 경기 평택시의 자동차 부품 공장을 개조한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고 있습니다. “진심을 나눌 사람을 찾고 싶어 그림을 그린다”는 그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신양 기획초대전 ‘제4의 벽’이 열리는 경기 평택시 mM아트센터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보이는 1층 전시 공간. 이곳은 전시와 동시에 박신양 씨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 공간으로도 꾸려져 있습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먹고살기 바쁜 세상, 그래도 ‘나는 누구인가’ 고민에 괴로워”
― 미술관 기획 초대전은 처음입니다. 이곳에서 전시하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그리는 이유는 연기를 공부할 때 예술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했던 시간이 그리워서입니다. 그런데 그간 그림으로 사업을 하자거나 판매하라는 압박이 생겼어요. 나는 그림으로 진심을 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트럭을 몰고 전국을 다니며 그림을 보여드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죠. 그러다 그림을 팔지 않는 미술관에서 초청을 해주셔서 전시하게 됐습니다.”

― 전시 개막과 함께 출간한 책 ‘제4의 벽’에는 배우와 인간 박신양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한 흔적이 진솔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10년 동안은 그 이유를 잘 몰랐어요. 요즘 세상에 “내게 그리움이 있다”고 말할 기회가 흔치 않죠. 그럼에도 마음속엔 계속 질문이 남았고, 그 답을 찾으려 신학대학원 철학과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런 질문을 만들고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은 하기도, 피드백을 받기도 어렵죠.
“사실 모두 먹고살기 바쁜 세상이고, 그런 생각은 한가하다는 눈총을 받기 쉬우니까요. 그런데 그게 불필요한 질문이냐? 절대 그렇지 않아요. 꼭 필요한 질문인데, 건너뛴 채 살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고,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연기하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버티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아팠던 것 같습니다.”

박신양의 ‘자화상 3’ (2017). 민음사 제공

― 사람들이 내 껍데기만을 본다는 느낌인가요?
“껍데기를 ‘만들어서’ 본다는 느낌이죠. 저는 미디어에서 일하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지만, 때로는 허상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어디다 그 불만을 토로하겠어요?”

― ‘이미지를 소비 당한다’는 생각도 들겠어요.
“그렇죠. 만들어진 이미지가 소비를 당한다. 그럼 내가 만들어지기 위해 노력했나? 사실 저는 사람들이 힘을 내기를 바라며 열심히 연기하고 표현하고 있었지만, 껍데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니었어요. 미디어를 통과하며 껍데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소비되면서 저보다 엄청나게 커진 거죠.”

― 그게 전시와 어떻게 연결이 됐나요?
“제가 연기할 때 몰입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유는 제게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표는 전파를 통해 어딘가에 있는 선한 사람들에게 나의 진심이 닿았으면, 그리고 그 사람들이 힘을 냈으면 하는 것이었어요. 그림도 그런 마음에서 그렸어요. 내 진심이 닿았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것, 식은땀 나는 일”

박신양 씨의 작업 공간에 놓인 물감 튜브와 배우로서의 프로필 사진.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책 ‘제4의 벽’에서 투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누군가 광야에 홀로 서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어울리는 장면이겠지만, 원형경기장에서 투우사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이상하고 희한한 광경일 것이다’라고 했죠. 배우로서 겪는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냈고, 그림도 그걸 정직하게 담았어요.
“솔직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가짜잖아요. ‘그럴듯해야 한다’는 강박을, 특히 연기하는 사람은 갖기 쉽고, 자기 이야기를 솔직히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아요.”

― 배우가 아니라도 자기를 드러내는 건 두려운 일이잖아요.
“식은땀 나는 일이죠. 저도 30년 동안 연기하는 후배들을 봐왔지만, 자기 자신의 표현에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연기도 그렇고 미술사를 봐도 그렇고 예술의 기본 조건은 스스로에게 정직함인 것 같아요. 저는 그 방향을 믿고 나아가는 거죠.”

박신양의 그림 ‘당나귀 22’ (2016). 민음사 제공

― ‘당나귀 22’라는 작품은 밝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저희 아버지를 보며 당나귀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어요. 어릴 적 아버지가 항상 온 가족이 함께 살 집을 그려서 이야기 해주셨고, 그 집을 짓고 싶은 땅도 위치를 정해 놓으셨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한 꿈도 아닌데 그러셨던 게 왠지 당나귀 같고, 그런데 나이를 먹고 보니 저도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고….”

― 어찌 됐든 아버지의 꿈과 그 집은 좋은 기억이니 이렇게 그린 거군요.
“네. 또 철학자 김동훈 선생님과 책을 쓰며 ‘상상’이라는 것이 큰 주제가 됐어요. 상상은 과연 나쁜 걸까? 그것이 때로는 공상이나 망상처럼 취급되잖아요. 원시 시대로 돌아가면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없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 돈, 언어, 이런 복잡한 개념이 생기면서 현실은 굉장히 구체화했지만, 상상은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됐죠. 물론 상상을 영화와 같은 사업으로 옮기면 큰 돈이 되죠. 시나리오, 소설, 시를 쓰거나 사업하지 않으면 상상할 자격을 얻지 못해요. 그런데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주어진 권리라고 생각을 해요.

― 상상이나 꿈이 욕망과도 연결이 되죠. 20세기 이전 철학에서 욕망은 절제하고 다스려야만 하는 것이었잖아요.
“재밌네요. 저는 어떻게 보면 상상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 반항을 시작했고, 나만의 행복을 꿈꾸기를 물러서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비록 아버지의 이상한 꿈일지라도, 저는 그 집을 생각할 때 정말 행복해요. 그래서 이 그림들은 아버지의 좌절된 꿈에 대한 처절한 심정에서 시작하지만, 내가 꿈꾸는 것을 실행하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긍정이기도 해요.”

―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욕망과 의지에 관한 것이겠죠.
“네. 그것이 만약 세상을 전복하고 다른 사람을 못 살게 군다면 안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죠. 사회에서는 돈이 안 되고 경제적인 이유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지만요.”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림을 그리는 이유

2층 전시장에서 내려다 본 1층 전시장 겸 작업 공간 모습.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그 상상에 대한 생각이 결국 전시장의 구조와도 연결되는군요.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에서 그림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요.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가상의 벽을 ‘제4의 벽’이라고 해요. 그림을 그리면서 저는 그 벽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어요. 상상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우리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꼭 거대 산업이 상품화한 것으로만 이뤄져야 하는지 그런 질문들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받아 온 감정과 감동이 혹시 주입 받은 것은 아닐까? 원점에서 생각하는 거죠.

‘나’라는 개인의 진짜 감정과 감각은 무엇인지. 그것이 다른 방식으로 상상을 만들어 낸다면 어떤 것이 가능할지, 그 감정이 나를 어디로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그림과 철학은 제가 그런 탐구를 하는 통로입니다.

― 관객이 2층에서 박신양 씨를 지켜보는 구조는 어떤 의미인가요.
관객분들이 2층에서 아래를 보며 가상의 ‘제4의 벽’을 보지만, 그 너머에 있는 저는 연기자가 아니라 감각하고 느끼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1층 층고가 6m가 넘어 그 광경이 영화의 ‘부감샷’처럼 보이는 것도 재밌어요. 제 표정이 너무 자세히 보이면 사소한 감정에 집중하게 돼요. 그것이 아니라 공간의 이동, 시간의 이동처럼 큰 개념을 표현할 때 부감샷을 쓰는데 이 전시의 기획 의도도 그런 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러시아로 무작정 떠나 선생님과 친구를 찾아냈듯 그런 기회를 다시 찾을 것이라는 꿈을 저는 매일 꿉니다. 예술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기회, 그리고 진심을 서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리라는 기대와 가능성.

그런 진심을 전시장에서 함께 나누기를 기대합니다.

박신양이 러시아 유학 시절 친구를 그린 작품 ‘키릴2’(2022). 그는 현재 러시아의 유명 배우이기도 하다.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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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이 묻은 청바지와 운동화,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박신양 씨는 2시간 넘는 인터뷰에서 ‘진심’을 쏟아 놓은 뒤 그림을 그리러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고민은 누구나 맞닥뜨리지만 회피하거나 잊어버리기 마련이죠. 이 질문을 물고 늘어졌던 박신양 씨는 철학과 예술에서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시가 막을 내리는 4월 30일까지 그는 이곳에서 작업을 이어 나갈 예정입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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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