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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 귀환 영웅담 위해 죽은가족 아픔까지 걸머쥐고 삽니다” 매출 180억 박정철 대표[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3-08-20 08:00:00

멀리 북녘 고향이 바라보이는 전망대에 선 박정철 대표. 고향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기억돼 있다.


1994년 10월. 6·25전쟁 때 적의 포로가 됐던 조창호 소위가 43년 만에 귀환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98년 12월 15일. 국군포로 박동일, 김복기 씨가 동시에 한국에 입국해 기자회견을 했다. 국군포로 2호 귀환자들이었다. 언론들은 다시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인간 승리를 위해 그들의 자녀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다. 국가가 이들의 귀환이라는 영웅 신화를 만들기 위해 국군포로와 가족들을 속여 결과적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젊음을 조국을 위해 바쳤고 45년 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찾아왔건만, 그 조국은 그들에게 거짓으로 회유하였고 평생 치유되지 않을 단장의 아픔을 본인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남겼다.

박동일 씨의 막내아들인 박정철 씨는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자이기도 하다. 박동일 씨의 귀환 뒤 북에 남겨진 2남4녀의 자녀 중 1남3녀, 또 이들이 남긴 어린 자식들까지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 국군포로 자녀의 삶

박정철 씨는 함경북도 회령군 세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두만강을 낀 이곳 사람들은 대다수 학포탄광에 다녔다. 그가 태어났을 때 1959년생 누나를 시작으로 자신까지 2남4녀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박 씨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 3학년인 14살 무렵 학습 열의를 잃었다. 자신의 가정환경을 알게 된 것.

아버지 박동일은 1926년 한반도 땅끝마을인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에서 태어났다.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살던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국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종전을 코앞에 앞둔 1953년 7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평양 승호리 포로수용소에 억류가 됐다가 종전 뒤 여러 국군포로와 함께 한반도 북단 학포 탄광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중국에서 살다가 나왔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에 꼬리표가 붙은 여성과 결혼했다. 여성도 두 번째 결혼이었다.

박 씨는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대학은 고사하고 군에도 입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크면서 알았다. 당시 학포탄광에는 많은 국군포로 출신들이 끌려와 있어 세천중학교에도 국군포로 자녀들이 많았다. 박 씨의 학급에도 2명이 있었다.

“저는 자랄 때 추석이나 한식에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산소에 가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친척이 하나도 없어서 놀러다닐 데도 없었어요. 북에 있을 때 아버지의 친한 지인이 살고 있다는 강원도에 한번 다녀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아버지랑 같이 싸우다가 함께 포로가 됐고 수용소에서도 생사고락을 했던 전우였더라고요. 같은 부대 출신이라고 한 명은 강원도 광산에, 한 명은 함북 탄광에 갈라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분은 오랫동안 친형제처럼 서로 의지하고, 연락하며 살았어요.”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 배치돼 막장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으로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졌다.

하지만 박 씨의 운명은 살짝 더 좋았다. 군에는 입대할 수 없었지만, 1년제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탄광에서 석탄을 실어가는 철도노동자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 박 씨는 학포탄광에서 좀 떨어진 작은 철도 분기초소에서 근무했다. 초소 근무자는 2명이었는데, 24시간을 기준으로 서로 교대근무를 했다. 근무자 두 명의 집이 한 지붕 아래 얇은 벽으로 칸막이만 구분한 것이라 옆집에서 하품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동안 형과 누나들은 모두 결혼해 분가를 했고, 박 씨 혼자 나이든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1997년 박 씨도 고등학교 동창인 탄광노동자의 딸과 결혼했다. 어려운 살림이라 결혼식도 못 올리고 그냥 한 집에서 동거하기 시작한 것. 다행히 그들이 사는 곳은 주변에 민가가 없는 외진 곳이라, 그를 포함한 네 식구는 산비탈을 개간해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래도 먹고 살기는 쉽지 않았다.

과거 박 씨가 근무했던 북한 철도. 사진에 보이는 열차는 기관차만 두 대가 달린 특별열차로 보인다.




● 아버지의 실종

박 씨의 집에서 두만강까지는 걸어서 35분 정도 거리였다. 그 동네 국경경비대는 겨울이면 그의 초소근처에 벌목하러 올라와 박 씨 가족의 신세를 졌다. 그래서 경비대 군인들은 그의 얼굴을 다 알고, 신세를 갚으려 했다.

1997년 여름 어느 날, 친한 군인과 잠복 초소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중국에 가면 대접을 잘 받는다며 자기와 함께 강 건너에 다녀오자고 했다. 군인은 군복을 벗더니 총도 수풀에 숨겨놓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두만강을 건너 맞은편 중국 마을에 들어가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리고 배고파서 북에서 왔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고 과일까지 권했다.

불과 몇 시간의 나들이였지만, 중국이 잘 사는 곳이라는 것을 박 씨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를 데리고 중국으로 갔던 군인도 제대 후 탈북해 한국에서 만났다.

그해 겨울 그는 중국에 살았던 어머니가 적어준 사촌형제들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품고 두 번째로 두만강을 넘었다. 현지 국경경비대와 잘 아는 사이라 넘는 것 자체는 별로 위험하지 않았다. 연길에 가니 여러 친척들이 모여 십시일반 도와주었다. 누구는 50위안을 내놓았고, 누구는 100위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모은 400위안을 들고 북에 가니 몇 달은 굶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1998년 봄 세 번째로 중국에 갔다. 이번에는 대접이 달라졌다. 몇 달 전에 도와주었는데 또 왔느냐는 눈빛이 역력했다. 이번엔 200위안을 받아 왔다.

그의 운명이 바뀐 사건은 1998년 초가을에 시작됐다. 어느 날 밤 그의 외딴집에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한참 뭔가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

며칠 뒤 아버지가 중국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겠다며 길을 나섰다. 형도 같이 간다고 했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 전 자신이 갔을 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또 가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중국 친척의 도움이 필요하면 중국이 고향인 어머니가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간다는 것도 이상했다.

아버지가 떠나고 일주일정도 지났을 때 형님만 사색이 돼서 돌아왔다. 그는 연길 친척집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박 씨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요시찰 대상이다. 사라지면 가뜩이나 반동 가족의 낙인이 붙은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가야 한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무슨 사연이냐고 재촉하니 그제야 어머니가 실토했다.

“사실은 네 아버지가 한국에서 결혼했던 사람이다. 아들이 하나 있고, 딸은 전처의 뱃속에 있을 때 군에 입대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지난 번에 집에 왔던 사람이 ‘한국에서 딸이 아버지를 찾는다’고 전해주더라. 그래서 아버지가 강을 건너간 것이다.”

박 씨는 아버지가 결혼했던 사람이라는 것, 자신들 말고 다른 자식이 또 있다는 것을 그때에야 알았다. 물론 어머니는 결혼해서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자녀들에게 터놓지는 않았던 것이다.

철도공사 시절 철원 백마고지 전적지를 찾은 박 씨. 아버지가 목숨 바쳐 싸운 추억을 찾아 나섰다.




● 보위원의 힌트

아버지를 찾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리면 돌아오지 않을까 속절없이 가슴을 조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10월 초경 담당 보위지도원이 박 씨 집에 나타났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박 씨를 불러내어 수갑을 채웠다. 무작정 끌려가니 보위부 구류장에 처넣었다. 그 외엔 아무 말도 없었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

20시간 정도 구류장에 앉아있는데 구류장 철문이 열렸다. 보위지도원은 수갑을 풀어주며 처음으로 한마디 해주었다.

“네 아버지가 없어진 것을 아는데, 일주일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알지? 집으로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가뜩이나 막대기 휘저어도 걸릴 것이 없는 살림에 뭔가 더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전날 저녁 식량을 비롯한 집안 전 재산을 싣고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일주일만 찾아볼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던 것.

급히 전갈을 띄워 근처에 살고 있던 온 남매가 그날 저녁 그의 집에 모였다. 남편이나 부인은 부르지 않고 오로지 박 씨 남매들만 모인 것.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던 넷째 누나는 연락을 할 수 없어 참가하지 않았다. 심각한 토론 끝에 어머니가 결론을 내렸다.

“나는 정철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친척들을 통해 아버지를 찾아보겠다. 보위원이 일주일을 시간 준 것은 그동안 도망치라는 신호다. 그러니 만약 1주일이 지나도 찾지 못하면 너희들도 모두 준비하고 있다가 탈북을 해라. 우리는 아버지가 없어지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형은 어머니의 말을 십분 이해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누나들은 “여자들은 출가외인인데, 남의 집에 시집가서 애까지 키우는 우리까지 잡아갈까요. 우린 좀 더 고민해볼게요”라며 수긍하지 않았다.

박 씨는 그날 밤 어머니를 모시고 두만강을 넘었다. 어떤 반응일지 몰라 부인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부부 사이엔 그해 4월에 태어난 아들도 있었다.

중국 친척집에서 열흘 정도 지내며 수소문했지만 아버지는 찾을 길이 없었다. 이제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박 씨는 어머니에게 가족을 데리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막아섰다.

“너는 아들이라 이제 갔다가 잡히면 무조건 죽어.”

“어머니는 제가 아들이라 걱정해서 그러지만, 그럼 제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저도 아들을 지켜야겠습니다.”

박 씨는 막아서는 어머니를 끝내 뿌리치고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이번 길은 국경경비대와 약속이 돼 있지 않아 무작정 넘어가야 했다.

한반도의 최북단인 회령지역은 9월말부터 눈이 내린다. 11월초 경이라 강에는 살얼음이 졌다. 신발을 신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려니 밤에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신발을 벗었다. 두세 걸음에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넘다 보니 50미터 남짓한 두만강을 건너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넘자마자 집으로 냅다 달렸다. 아내와 아들은 집에 있었다.

“아버지를 찾지 못했어. 그러니 우린 수용소로 끌려가야 해. 너는 살겠지만, 우리 아들은 수용소에 끌려갈 거야. 어떻게 할래. 나 따라 지금 떠날 거야?”

아내는 아무 말도 없이 포대기에 애를 업고 박 씨를 따라 나섰다.

“그때 저를 믿고 따라 나선 아내가 지금도 너무 고맙습니다. 그때 그가 부모형제 때문에 망설였다면 엄청 위험해졌을 겁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하니 ‘우리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벽에 박 씨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두만강에 나왔다. 지형지물도 눈에 훤하고, 단속초소 위치도 잘 알고 있어 걱정이 없었지만 7개월밖에 안 된 아들이 울까봐 제일 걱정이었다.

“하늘이 살라고 도왔는지 두만강을 건너는 동안 아들은 울지 않더군요. 그런데 강을 다 건너 중국 땅에 첫 발을 딱 내딛는 순간 아들이 울었어요.”

아침에 연길 친척집에 들어오니 귀가 쓰렸다. 만져보니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발이 근질거리기 시작하더니 검게 변했다. 맨발로 두 시간동안 얼음 위를 걷느라 동상에 걸린 것. 그런데 사선을 넘나들 당시에는 그런 사실도 몰랐다.

며칠이 지나자 형이 혼자 중국에 들어왔다. 형수는 교원의 딸이었는데 “절대 따라갈 수 없다”고 해서 혼자 왔다는 것. 누나들도 “우리는 남편도 자식도 있어 따라가지 않겠다”고 생각을 돌렸다고 형이 전해주었다.

힘들 때면 종종 한강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신체를 단련한다. 사진은 2014년 철도공사 재직 시절의 모습이다.




● 아버지만 한국으로

아버지가 머물렀던 중국 친척집에서 한 달 정도 있었을 때 가방을 옆구리에 낀 남자가 나타났다. 중국 친척들이 그를 알아봤다.

“저 사람이 너희 아버지 데려간 사람이야.”

그러자 남자가 실토했다.

“사실 저는 한국 모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버님은 저희가 잘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가족을 한국에 데려가려 왔습니다.”

다음날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단장을 시키고 사진관에 데리고 가 여권사진까지 찍었다.

그런 다음 남자가 박 씨만 따로 불렀다.

“실은 아버지가 여권도 나왔고 비행기로 한국으로 모셔가려고 하였는데, 내가 가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이 죽는다며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가서 아버지를 좀 설득해주세요. 가족 모두 중국에 왔고, 여권 사진도 찍고 한국 갈 준비를 하는 중이니 아버지가 먼저 한국에 가면 우리가 한달안에 따라간다고 말입니다.”

박 씨는 가방 낀 남자를 따라 모 호텔로 갔다. 정말 아버지가 있었다.
박 씨는 남자가 시킨 대로 말을 했다.

“어머니랑 형이랑 중국에 와있어요. 여권 사진도 찍었고, 우리도 한 달 내로 한국으로 갈 수 있대요. 아버지 먼저 가세요.”

아들이 와서 말을 하자 그제야 아버지도 한시름을 놓은 표정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1998년 12월 15일 한국 언론에는 일제히 국군포로 2명의 귀환소식이 실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국군포로 2명,가족2명 함께 北탈출 귀환

국가안전기획부는 14일 한국전쟁 중 포로가 돼 북한에 끌려갔던 김복기(67) 박동일 씨(71)와 이들의 가족 2명이 최근 북한을 탈출한 뒤 제삼국을 통해 귀환했다고 밝혔다. 안기부는 이들이 53년 7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납북된 뒤 평양 승호리 포로수용소를 거쳐 함북 회령의 학포탄광에서 광원으로 함께 생활해왔다고 말했다.안기부는 이들과 함께 입국한 김 씨의 차남 영구 씨(31)와 박씨의 4녀 정심 씨(30)는 91년 4월 결혼한 부부라고 덧붙였다. 한기흥 기자”
박 씨 가족의 탈북은 위 기사 속 김복기 씨의 차남 김영구 씨로부터 시작됐다. 박 씨의 넷째 누나가 김영구 씨와 결혼했던 것. 까치는 까치끼리 만난다는 속담처럼, 출신성분이 매우 나쁜 국군포로 가족끼리 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생활형편이 어려워진 김영구 씨는 중국으로 탈북했다.

한국에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친척을 찾기 위해 한국 방송의 가족 찾기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안기부에 포착됐다. 안기부가 김 씨와 접촉해 아버지의 국군포로 여부를 조사하던 중 김 씨가 장인도 국군포로라고 밝혔다.

그러자 안기부는 박 씨의 집에 사람을 보냈다. 그가 1998년 늦여름에 찾아왔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유복녀로 남겨놓은 딸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이야기도 실은 박동일 씨를 중국에 데려오기 위해 꾸며낸 말이었다. 안기부는 김복기 씨와 박동일 씨를 한국에 데려가 조창호 중위에 이은 ‘국군포로 2호의 귀환’에 대한 보도 자료를 자랑스럽게 언론에 배포했다.

비행기에 앉은 박 씨.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는 그렇게 어려웠지만, 지금은 사업 때문에 지겨울 정도로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




● 수용소로 끌려간 혈육들

아버지의 귀환 소식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자 중국에 남겨진 박 씨 가족은 그날부터 불안에 떨어야 했다. 아직 북에는 누나들이 남아 있었고, 또 중국에 숨어사는 자신들에게도 북한의 추적이 들어올 수 있었다. 체포돼 북송되면 꼼짝없이 죽어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족을 한국에 데려간다던 가방 낀 남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기다려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박 씨의 형이 체포됐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의 등록서류에 중국에 사는 친척 주소들도 올라 있었던 것이다.

북한 보위부는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납치조를 파견했다. 당시 박 씨 가족은 친척집에 흩어져 지냈는데, 납치조가 첫 번째로 들이닥친 친척집에 형이 있었다. 이들은 형을 차에 싣고 곧바로 북한으로 나갔다.

형과 함께 있던 친척이 급히 도망치라고 전화가 왔다. 박 씨 가족은 양말도 신지 못하고 집을 나와 택시에 올랐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들은 무작정 한족이 많은 동네로 가서 숨었다. 그곳은 연길 옆 왕청이라는 지역이였다.

박 씨 가족은 이곳에서 5개월을 지냈다. 아버지가 자신이 받은 정착금을 보내와 그걸로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중국에 남겨진 가족들도 데려와 달라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하소연했지만, 이미 귀환을 정치적으로 써먹은 사람에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국군포로의 귀환 뒤에 남은 건 또 다른 이산가족이었다.

박 씨 가족도 한국으로 가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했다. 탈북 후 8개월 뒤 위조여권을 통해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브로커가 나타났다. 4명을 보내는데 6000만 원을 불렀다. 아버지가 귀환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보냈다. 그 덕분에 이들은 중국의 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입국했다.

국군포로 박동일 씨만 귀환시킨 후 중국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던 안기부는 이들이 입국하자 또 생색을 냈다. 1999년은 안기부에서 국정원으로 명칭을 바꾼 때였다. 1999년 8월 16일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작년 귀환 국군포로 일가족 4명 입국

국가정보원은 16일 지난해 12월 귀환한 국군포로 박동일 씨(72)의 부인 허순영 씨(65) 등 일가족 4명과 최철규씨(37) 등 모두 5명이 15일 제삼국을 통해 밀입국, 귀순을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허씨 일가족은 지난해 11월, 최씨는 지난해 8월 각각 북한을 탈출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어 현재 자세한 탈북동기 등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 5명을 포함, 북한을 탈출해 올해 한국에 도착한 북한이탈주민은 모두 65명이다. 한기흥 기자’
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가방 끼고 다니던 남자가 나타났다. 박 씨의 어머니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자식들을 살려내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 나도 공무원이라 위에서 지시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고 사과했다. 박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도 그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요. 그러나 한국에 와서 공기업에서 20년을 일해 보니 그 사람이 이해가 됩니다.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겠죠. 결국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정부와 안기부 고위급들이 문제였던 것이죠.”

박 씨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북에 남은 누나들이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이 왕청에 숨어살 때 아버지가 보내준 돈을 쪼개 인편을 통해 북에도 내보냈다. 그러면서 빨리 중국으로 탈출하라고 했다.

세 누나들은 “우리가 결혼을 했는데 설마 잡아갈까”라며 반신반의하면서도 자식들 때문에 쉽게 뜰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재촉이 심해지자 김일성의 생일로 북한 최고의 명절로 치던 4월 15일에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며칠 내로 떠나기로 자신들끼리 약속했다.

그런데 보위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4월 16일 새벽에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남편과 자식은 두고, 누나들만 싣고 갔다. 형의 집에도 트럭이 들이닥쳐 아내는 놔두고 생후 1년 반이 된 어린 아들을 빼앗았다. 이미 트럭에 태운 누나들이 조카를 받아 안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동네 사람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형과 누나들의 소식은 이후 영영 알 수 없었다.

생떼 같은 자식 4명과 장손을 잃은 박 씨의 어머니는 한국에 들어올 때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방 낀 남자를 잡고 화풀이를 해도 시계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때 네 아버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네 형제들이 죽지 않았겠는데….”

그게 어머니의 평생의 한이었다. 또 박 씨의 평생의 한이기도 했다.

한국에 온 이후 그는 고향이 바라보이는 중국 땅에도 몇 번 가봤다. 그러나 다시 가지 않은지 꽤 됐다.

“통일되면 남들은 다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곳엔 남은 가족도 없을뿐더러 너무 아픈 추억들만 남겨주어 지우고 싶은 곳입니다. 그냥 가족이 그리울 때면 맞은편에서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철도공사 재직 시절인 2012년 유니폼을 입고 책상에 앉아있는 박 씨.




● 철도공사의 탈북민 역장

2000년 1월 박 씨 가족은 서울 지역에 17평 영구 임대주택을 받아 정착을 시작했다.

나와 보니 아버지는 고향인 해남에 가 있었다. 그곳은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했고, 전쟁 때 남겨둔 본처와 아들딸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중에 박 씨의 어머니도 남편을 찾아 해남에 가서 살았다. 박 씨 아버지는 2014년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 씨의 어머니는 지금도 해남에 살고 있다. 정이 든 곳에서 남은 여생을 살겠다는 것.

아버지가 해남에 남겨둔 전처의 아들은 박 씨 가족을 만나길 거부했다. 딸은 몇 번 정도 만났지만 아버지가 돌아간 뒤 남남이 돼 다시 본 일은 없다. 박 씨에겐 배다른 형이고, 누나이지만 전혀 다른 추억을 공유한 이들이 접점이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 씨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분들도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전사자로 인정돼 현충원에 묻히고, 그 분들의 어머니는 재혼도 하지 않고 자식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아버지 없는 설움 속에 크면서 얼마나 원망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문뜩 아버지가 북에서 다른 처와 자식들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1년 넘게 받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로 박 씨의 몸무게는 43㎏에 불과했다.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

첫 직업은 건물 리모델링을 하는 회사였다. 새벽 5시에 나가 밤 10시까지 일했다. ‘함마(해머)’로 벽을 하루 종일 부수고온 날은 손이 떨려 숟가락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일하다가 우연히 벼룩시장에서 철도공무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봤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처럼 북한에서 철도원으로 일했던 사람은 경력을 인정받아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그는 통일부에서 5년 6개월의 북한 철도원 경력 인정서를 들고 시험장에 갔고 결국 8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엔 철도청에 입사하면 공무원 자격을 받았는데, 지금의 철도공사로 바뀌었다.

입사 후 서울 동대문구 이문역(현 폐역) 수송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이문역 주변에는 연탄공장들이 많아 화차가 많이 들어왔는데, 그는 화물열차를 떼고 붙이는 일을 주로 했다. 해보니 한국 철도와 북한 철도는 비슷한 것이 많아 적응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24시간 맞교대도 같았고, 철도 규정이나 열차 연결 방법 등도 비슷했다.

하지만 언어는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역장이 조회시간에 그에게 “열중 쉬어”를 외쳤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네”하고 멀뚱멀뚱 쳐다만 봤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역장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화가 나 다시 소리쳤다. 그도 목소리를 높여 “네”하고 또 쳐다봤다. 화가 나 목청을 높이는 역장과 천연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조회시간이 폭소 바다가 됐다. 마침내 역장도 같이 웃고 말았다.

학연, 지연, 인맥이 없이 직장 생활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다. 24시간 근무시간에 사표 쓸 생각을 24번은 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렇게 20년을 근무하고 역장으로 2020년에 명예퇴직을 했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박 씨의 회사 건물. 사업 확장을 위해 올해 회사를 크게 늘였다.




● 매출 180억 원을 이뤄내다

퇴직하고 그는 무역회사 대표로 취임해 사업을 시작했다. 공공기관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 철저히 ‘을’로 살아야 했다. 운영하는 회사는 대기업의 대리점에서 물품을 받아다 해외에 파는 일을 했는데, 그가 대표로 부임할 당시 월 매출이 3억 원 정도였다.

이런 방식으로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물품을 받기 위해 대기업 본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가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가 가장 품을 들인 회사는 해외 거래처들이 요구하는 아모레퍼시픽이었다. 그런데 갈 때마다 좋은 제안이라고 하면서도 ‘티오(자리)’가 없다고 마냥 기다리라고 했다.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다른 여러 회사들이 분명 새로 계약을 맺었지만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회사에 가서 항의를 했더니 지난해 5월에야 마지못해 6개월 계약을 체결해주었다. 이런 계약은 최소 1년 단위로 맺어주지만 그에겐 6개월이 한계였다.

그래도 이것을 기회로 삼고 그는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여 지난해 매출 180억 원을 기록했다.
그런데 올해 맺은 계약 역시 6개월짜리였다. 상반기에 그는 통일형 사회적 기업 인증도 받았고 회사 직원도 6명으로 늘어났는데,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 대출을 끼고 양평에 새 회사 건물도 장만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그의 회사 매출의 80%가 현재 아모레퍼시픽 생활용품에서 나오는데, 올해 하반기엔 절망적인 계약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회사에 주던 물품의 브랜드 종류가 5건에서 1건으로 줄어들었고, 내년엔 재계약이 없다는 조항까지 계약서에 박혔다. 해외에서 주문은 여전히 많이 들어오지만, 그가 본사에서 물건을 받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한다.

지난해 본사 영업담당자 3명이 거래처에 상품을 공급하고 대금을 빼돌리는 방식 등으로 30억 원을 횡령해 기사까지 났다.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던 사람들이었다.

“지금 시한부 인생을 사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삽니다. 이젠 직원들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탈북할 때와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코로나도 큰 위기 없이 넘겼는데, 지금 이런 위기에 닥칠지는 몰랐습니다. 저는 북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형과 누나들의 인생까지 대신 산다는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 하나 이겨낼 겁니다.”

남한강변을 따라 집으로 퇴근할 때 어둠에 잠긴 강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강물은 흐르고, 아침이면 태양이 뜬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