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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유튜버 겸직 장관…23년째 비상 못하는 ‘완전연소남’ 원희龍[황형준의 법정모독]

입력 | 2023-06-22 14:00:00

[23화]




4월 국회에 출석한 원희룡 장관. 동아일보DB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뒤늦게 재능을 찾은 것 같았다. 국민들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공부의 신’이라고 해서 꼭 남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둘 다 갖췄다.

전국 수석과 대장동 1타 강사로 국민적 인지도를 얻었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하 원희룡)의 이야기다. 1982년 대학입시에서 전국 수석과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1992년 34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이라는 진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원희룡은 장관 취임 이후인 지난해 7월 ‘원희룡 TV’에서 유튜브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는 단서로 국무총리로부터 겸직 허가까지 받았다고 했다. 세계 최초라고 한다.

그는 당시 “여러 장관 중에 대표 주자로 유튜버 겸직 장관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다”며 “어떤 분들은 또 장관이 매정하게 ‘야 장관이 일이나 똑바로 하지 무슨 유튜버야?’ 그런 분들은 아시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늘, 참, 열심이다. 정책 홍보와 국민 소통 등을 이유로 시작한 유튜브의 이 영상은 현재 기준 조회 수 1만7000회에 그쳤다. 다시 시작한 원희룡 TV 구독자 수도 17만8000명에서 약 1년 동안 19만4000명으로 1만6000명밖에 안 늘었다(그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아쉬워했다).


원희룡은 올해로 정치에 입문한 지 23년이다. ‘소장파’로 이름을 날린 그도 이제 어느덧 환갑을 앞두고 있다. 더 이상 ‘차세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지냈고, 당 사무총장과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제주도지사에 두 번 당선됐다. 하지만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되지 못했고, 2007년과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선거 경선에 출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꽃이 너무 빨리 핀 것일까. 좀처럼 뜨질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이면서도 당내에선 비주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보수 여당에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왔고, 제주도 출신으로 영남이 기반인 당에서 활동했다.

정치를 오래했지만 최근 국민들에게 각인된 건 대장동 1타 강사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지금이라도 그냥 1타 강사로 전업해 교육업계로 진출하는 게 어떠냐는 조롱도 들린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마라톤 유세’를 폈던 안철수 의원에게 ‘마라토너로 전업하라’는 비난처럼…물론 원희룡도 마라톤에 심취해 2005년에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는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다. 정치적 부침은 있었지만 그의 정치엔 진정성이 느껴진다.


“우리 사회에 고통이 있는 한, 누군가는 이 고통을 나누고 덜어내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저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중략) 긍정의 정치의 근본 뿌리에는 우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끌어안는 ‘사랑의 철학’, ‘사랑의 정치’가 있습니다.”
                                                                                                        -원희룡, ‘사랑의 정치’-


● 연수원 동기 “제주도에서 ‘원희룡 아냐’ 물으면 다 알아”

1992년 10월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의 영광을 차지한 28세 원희룡 장관의 모습. 동아일보DB


그는 1964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시장에서 고무신, 농약 등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늘 가난과 함께했다. 중학교 3학년까지는 전깃불도 없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부모님을 보면서 함께 떨었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마지막에 하다 망한 게 책 장사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의학대백과 사전부터 동화책, 만화책, 심지어 농사에 관한 책까지 다 읽었다.

제주제일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들어간 대학 캠퍼스에선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이 한창이었다. 그도 바로 사법시험을 보지 않고 학생운동을 함께 했다.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경찰서에 끌려갔고 철제 의자로 숱하게 맞았다고 한다.

실제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하는 원희룡은 가리봉동 5거리 시위와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서울대생의 모습이다. 구로공단에 있는 야학에서 연합을 해서 공동으로 유인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인 것.


“서울남부경찰서는 지난 25일의 九老구 加里峰동5거리 시위와 관련、元喜龍 군(20·공법학과 3년) 등 서울대생 4명을 소환、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1984년 6월 4일 자 <경찰 시위 주동 大學生 일제 소환> 기사 중-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경인 지역 공장에 위장 취업해 2년 가까이 지하 노동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구 공산권이 몰락하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6공화국이 들어서자 고민이 깊어졌다. 석 달 동안 무전여행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투적인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이념이 아닌 자유주의를 통해 헌법 내에서 우리의 이상을 충분히 담아내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투쟁적·조직적으로 진지전을 벌이는, 집단주의 이념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사법시험 준비에 나섰고 1992년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수석 합격 기록이 많던 그는 연수생 사이에서도 유명했다고 한다. 24기 연수원 동기의 전언이다.


“연수생들 사이에 리더 같은 존재였다. 연수원 때 우리가 다 모여서 무슨 민사 판결문이 어쨌다, 형사 판결문이 어쨌다, 시험 얘기만 할 때 희룡이 형은 ‘지금 세계정세가 어떻고 아시아가 어떻고’ 이런 굉장히 들을 만한 얘기를 많이 하셨다. 그때도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등 미래학에 관한 책도 많이 봤다. 그때부터 ‘정말 이 사람은 똑똑하다 그러고 정치할 것 같다’ 그런 평이 많았다. 그때 이제 연수생들이 놀란 게 제주도를 놀러 가서 택시를 타서 ‘혹시 원희룡 아시냐?’ 그러면 다 알 정도로 제주도에서 수재(秀才)로 유명했다.”
                                                                                                                        -취재 메모 중-

최상위권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마친 그는 검사를 지원했다. 판사보다는 현장을 다니며, 백지인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검사직에 더 끌렸기 때문이다.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2년, 여주지청 1년, 부산지검 6개월 등 3년 6개월간 검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국가적 위기에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사표를 냈고 변호사로 활동하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를 받고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 소장파 개혁운동 이끌어… ‘한나라당의 유시민’ 평가도

2000년 4월 당선된 386운동권 출신 의원들. 왼쪽부터 김부겸 김성호 오세훈 임종석 원희룡 장성민 당시 의원.  동아일보DB



“대한민국 안보와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게 보수였다. 보수가 변해야 한국이 압도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진국의 우파나 보수들이 갖고 있는 그 품격과 실력에 대해서 상당히 부러웠다. 그래서 한국도 그렇게 가야 되지 않았나 이렇게 봤고… 386운동권의 상당히 부패하고 자기 합리화적인 오만한 그런 구석들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들과 동화되기 싫은 측면도 있었다. 그게 20년 뒤에 조국 사태로 피크를 쳤다.”
                                                                                                                         -취재 메모 중-

원희룡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의 나이 만 36세였다. 그는 당내에서 남경필 정병국 의원 등과 함께 움직이며 소장 개혁파의 대표 선수가 됐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2003년 “당내 60세 이상은 물러가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2004년 최병렬 당시 대표 퇴진 카드를 꺼내 드는 등 쇄신에 목소리를 냈다.

2004년 7월부터 2006년까지 최고위원을 지내며 쓴소리를 이어갔다. 국가정보원의 X파일 처리와 감세안, 대북 지원 방안 등 여야가 대치하는 주요 현안마다 당론과 다른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혀 왔고 ‘한나라당의 유시민’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2006년 1월엔 당의 사학법 장외 투쟁과 관련해 당시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病)”이라며 비판했다가 당내 반발이 커지자 공개 사과하기도 했다.


“저는 그동안 당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소장 개혁파’로 당내에서 쓴소리를 많이 하니까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고 오히려 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참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원희룡, ‘사랑의 정치’-
당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여당에선 “좌파”라고, 야당에선 “변절자”라는 등 양쪽으로 비판을 받았다. 학생운동권 출신이 보수 정당에 몸을 담는다는 것부터 각오는 했고 내부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역할로 ‘포지셔닝’을 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소신대로 하고 불이익은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변화하지 않으려는 집단의 관성은 공고했다.

그가 여당 내 비주류로 주목받지 못하게 된 이유다. 소장파로서 주어진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원희룡은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 당시 후보와 경선했지만 낙마했다. 2010년 서울시장 경선에서 오세훈 당시 시장에게 밀렸고 2011년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선언과 함께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홍준표 현 대구시장에 밀려 당 대표의 꿈은 좌절됐다. 주변에서 수재라고 대우만 받던 그도 줄줄이 쓴맛을 맛본 것이다.


● ‘잃어버린 10년’ 이후 다시 중앙무대로

7일 충북 청주시 청원구 문화제조창 중앙광장에서 열린 ‘평택-오송 고속철도 2복선화 착공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과 원희룡 국토부 장관,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행사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12년 총선에 불출마한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등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내고 휴지기를 가진 뒤 2014년 제주도지사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7년 대선에 불출마했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도지사로 7년간 근무하며 원희룡은 차근차근 행정 경험 등을 쌓았다. 2017년 유권자시민행동이 수여하는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제주 신항만 건설과 영리병원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는 중앙무대에선 조금씩 잊혀져 갔고 소외됐다.

반전은 2021년 대선 경선에 출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원희룡은 그해 10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벌어진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이 불거지자 유튜브를 통해 관련 의혹에 대해 ‘대국민 강의’를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누리꾼들로부터 ‘대장동 1타 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당시 “원 후보의 ‘대장동 게이트 1타 강사’ 동영상을 봤다. 아주 잘 설명하셨다”며 “솔직히 말하면 원 후보의 그런 능력이 부럽기까지 했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2021년 11월 경선 결과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고 원희룡은 4위에 그쳤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를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으로 임명해 정책을 총괄하도록 했다. 대선 뒤에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기획위원장을 신설해 원희룡에게 위원장을 맡긴 뒤 5년의 핵심 국정 과제를 조율하도록 했다.

윤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원희룡은 지난해 4월 윤석열 정부 초대 국토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서울대 법대 3년 선후배 사이지만 학창 시절에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부동산정책, 지역 균형 발전, 화물연대 파업 등 각종 현안의 주무 장관으로서 현장을 누비고 있다.


● 학보사 기자였던 한동훈이 ‘연수생 원희룡’ 인터뷰… 기이한 인연

원희룡 장관과 한동훈 장관. 동아일보DB

한동안 ‘차세대’로 불렸던 원희룡은 이제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같은 후배들에게 ‘차세대’란 바통을 물려줄 때가 됐다. 서울대 법대 10년 후배인 한 장관과 그의 인연도 기이하다. 원희룡은 대학에서부터 전국 수석 등으로 유명했던 만큼 그가 사법연수원을 다닐 시절 한 장관이 그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의 학보사인 ‘법대신문’ 기자로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것. 향후 그를 만난 한 장관이 약 30년 전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며 이를 언급했다고 한다. 원희룡은 한 장관에 대해 “아주 명석하고 상황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고 저랑도 옛날에 인연이 있는 선후배 관계”라고 평가했다.

원희룡은 이미 윤석열 정부와 운명공동체다. 그의 미래는 윤석열 정부의 성공 여부와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그를 두고 국무총리 발탁이나 내년 총선 출마 및 향후 당 대표 도전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대한 원희룡의 답변이다.

“아직 국토부에서 해야 될 임무가 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개인의 어떤 미래의 진로를 따로 생각하기보다는 윤석열 정부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거기서 우리 대통령께서 가장 좋은 구상을 펼쳐 가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국민들에게 단체전 평가 점수를 잘 받을 거냐, 여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되는 거고요. 그런 점에서는 한동훈 장관이나 저나 마음이 똑같다. 만약에 총선을 앞두고 윤 대통령이나 당에서 ‘당으로 돌아가라’ ‘총선을 뛰어라’라고 하신다면 나는 가기 싫어요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원희룡 장관은 자칭 ‘완소남’입니다. ‘완전 소중한 남자’가 아니라 ‘완전 연소를 꿈꾸는 남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정치’에서 “되돌려주는 삶,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잡거나 속도를 조절함에 있어 가장 지혜로운 철학”이라며 “되돌려주는 삶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자신이 한국으로부터 많이 받은 인생을 산 만큼 자신을 불살라 한국에 바치겠다는 뜻이지요.

그는 윤 대통령의 장점에 대해 “결단을 내렸을 때 그 결단을 믿고 밀고 나가는 어떤 결기와 강단, 뚝심이 있다”며 “또 사람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고 사람 관계 속에서의 인간적인 결속력을 굉장히 중시하는 리더십이다. 그러니까 이제 ‘석열이 형’으로 불리고 보스 기질이 있고 친화력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석열이 형’으로 부른 적은 아직 없다고 하네요.

정치인으로서 그의 한계는 낮은 인지도와 세력의 부재입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알고 또 거기에 진정성과 전력을 다하면,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둘 것”이라며 “함께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들하고 모든 걸 나눠야 되는데, 원희룡이 안 나눠줄 것 같고 자기 혼자 깨끗할 것 같은 이런 느낌 때문에 안 되는 거라면 그건 제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내가 안 변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인식이 안 변하는 문제일 테니까 제가 변화하면 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라며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20년 전 “당내 60세 이상은 물러가라”고 외쳤던 나이도 이제 내년입니다. 완소남은 과연 뜰 수 있을까요? 그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질지 그의 미래와 변화가 궁금해집니다.

다음 법정모독 [24화]는 야당의 광역단체장으로 넘어갑니다. 자칭 ‘즐거운 희망 전도사’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