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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이 남긴 유산[이원홍의 스포트라이트]

입력 | 2023-05-23 03:00:00

박항서 감독이 2019년 한국으로 전지훈련을 하러 왔을 때 김해공항에서 팬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박 감독은 베트남 23세 이하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을 모두 지휘하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부산=뉴스1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박항서의 추억.’

최근 끝난 2023 동남아시아(SEA)경기대회 축구대회 결승은 여러모로 박항서 감독(66)과 베트남 대표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68)이 이끄는 베트남은 16일 이 대회 3, 4위 결정전에서 미얀마를 3-1로 물리치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결승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연장 접전 끝에 태국을 5-2로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대회가 눈길을 끈 이유는 박 감독이 베트남을 이끌 당시 가장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대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2017년 베트남에 부임한 박 감독은 201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이 대회 결승에서 22세 이하 대표팀을 이끌고 인도네시아를 3-0으로 완파하며 베트남에 60년 만의 우승을 안겼다. 당시 거리에 쏟아져 나왔던 베트남 축구팬들의 열기와 환호, 박항서의 이름을 외치며 베트남 국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들던 모습은 절정에 올랐던 ‘박항서 매직’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여전히 선명히 기억되고 있다. 박 감독은 2022년 대회에서도 우승을 이끌며 대회 2연속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길거리를 가득 메운 베트남 팬들의 환호와 열기는 그대로 이어졌다.

그랬던 이 대회에서 박항서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의 베트남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팬들은 궁금해했다. 베트남은 올해 초 박 감독과 계약을 종료했다. 트루시에 감독으로 새 체제를 꾸린 베트남은 이 대회 3연속 우승을 노렸으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베트남은 인도네시아와의 준결승에서 2-3으로 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박 감독 시절 뜨거운 환호를 이끌었던 대회였지만 이번에는 그때만큼 강렬한 기쁨의 표현은 없었다. 박 감독이 이끌던 베트남 대표팀과 그 이후는 이 대회를 통해 뚜렷한 대비를 보였다.

물론 베트남이 일군 3위의 성적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베트남이 박 감독 체제 이후 더 높은 도약을 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는 것도 당연하다. 베트남은 대회 내용을 분석하면서 더 나은 성적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분주하다. 베트남 축구계는 대회에 참가한 젊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경험과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을 촉구하고 있다.

대회 정상에 올랐던 경험과 기억은 베트남에 계속해서 그 수준을 유지하거나 넘어설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의 도약에 있어서 넘어서야 할 도전의 대상이자 기준점을 남기고 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트루시에 감독이든 누구든 당분간 베트남 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들은 박 감독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이를 통해 그들 또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박 감독이 베트남에 남겨 두고 온 소중한 유산일 수 있다. 말하자면 박 감독은 베트남에 혁신의 씨앗을 남겨 놓고 온 셈이다.

박 감독은 그 자신이 혁신의 전파자임을 증명했다. 그는 베트남에 부임한 뒤 선수들의 체력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음을 간파하고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또 전술 이해도를 심화하는 훈련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자신감을 높이려 애썼는데, 이는 그가 선수의 발을 직접 마사지해 주거나 허물없고 격의 없는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해주는 아버지와도 같은 ‘파파 리더십’을 통해 빛을 발했다. 필요한 부분에 대한 처방과 그 소탈하고 인간적인 진심이 선수들을 일깨우고 점차 개선된 성적을 내게 하면서 팀 전체가 열정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했다.

그 자신은 은퇴가 가까운 나이에 아무런 연고도 없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국에 가서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일구었으니 스스로의 인생 자체에서도 도전과 혁신을 통한 열매를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부 베트남 팬들이 박 감독 퇴임 즈음 지나치게 수비 위주의 전술을 펼친다는 등 박 감독에 대한 비방을 표현했다는 뉴스가 있기도 했지만 이는 베트남 팬들이 더 나은 성적을 염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일 뿐 베트남 팬 전체의 뜻은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에는 베트남에서 일군 박 감독의 업적과 그동안 베트남 팬들이 보여준 그에 대한 감사와 환호는 너무나 크고 뚜렷했다.

베트남과 한국이 이만큼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박 감독의 역할이 컸다. 박 감독의 베트남 전성기 시절을 일구었던 대회를 바라보면서 새삼 그의 활약과 업적이 겹쳐 떠오른다.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