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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태어났으니 멋지게”…무기력하던 어르신이 변했다 [따만사]

입력 | 2023-03-23 12:00:00

‘신이어마켙’ 제공


Q. “사는 게 재미없어요.”

A. “기왕에 태어났으니까 멋지게 살아봐.”

Q.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이 뭘까요?”

A.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우선 돈이 있어야겠지요.”

‘신이어마켙’ 상담소에는 청년들의 다양한 고민이 모인다. 카운슬러로 변신한 16명의 어르신들은 개성이 느껴지는 각양각색의 답변들을 내놓는다.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직설적이다. 어르신들은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응원의 메시지를 꾹꾹 눌러 담는다. 어린 시절 느꼈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따스함과 정겨움을 기억하는 MZ 세대들이 ‘신이어마켙’을 찾는 이유다.

노인 빈곤율 OECD 1위…시니어 위한 일자리 없다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노인 빈곤율(중위소득 50% 이하)은 2021년 기준 37.6%다. OECD 국가 평균인 13.5%(2019년 기준)와 비교하면 약 3배에 이른다. 은퇴를 앞둔 고령층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불안정한 일자리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아립앤위립’은 이런 문제점들을 고찰하고 해결책을 찾는 데서 출발한 사회적 기업이다. 심현보 대표는 폐지 수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저소득층 어르신들에게 보다 나은 일자리를 제공해 어르신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 있다.

아립앤위립이 운영하는 소셜브랜드 ‘신이어마켙’은 저소득층 노인들을 디자이너로 채용한다. 연장자를 뜻하는 영단어 ‘시니어(Senior)’를 모르는 어르신들이 ‘신이어’라고 발음한 것에서 따왔다.

‘신이어마켙’ 제공

‘신이어마켙’ 제공



심 대표를 비롯한 청년 직원들이 주제를 선정하면 디자이너로 채용된 어르신들은 그에 맞는 그림들을 그린다. 심 대표는 완성된 그림에 저작권료를 지불한다. 그렇게 1차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구매한 창작물은 수제 노트, 그림엽서, 스티커 등 제품에 입혀진다. 만들어진 제품을 포장하는 작업은 다시 어르신들에게 맡긴다. 이것이 2차 일자리다.

노인들과 청년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장도 열린다. ‘신이어 상담소’에서는 청년층의 고민을 수집한다. 어르신들은 이 고민에 손글씨로 답한다. 여기에서 나온 문구들이 ‘인생은 짧다’, ‘일단 살아봐’, ‘기왕에 태어났으니까 멋지게 살아봐’ 등이다.

이러한 문구들은 온라인상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눈물이 난다’,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소비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문구를 모아 책으로 엮기도 했다. 심 대표는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따뜻한 문구를 보고 만나 뵙고 싶었다’며 오신 손님도 있고 많이 회자됐다”며 뿌듯함을 드러냈다.

폐지 수거하던 할머니를 보며 마음 아팠던 청년

김혜린 동아닷컴 기자 sinnala8@donga.com



심 대표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평범한 직장 생활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그러던 중 친할머니가 폐지를 줍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소일거리로 일을 해 오셨던 할머니는 폐지를 줍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 주변의 할머니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심 대표는 말했다. 어린 시절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대신 할머니 손에 자란 심 대표에게는 할머니의 친구들도 할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창업을 결심했다.

어르신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 방문한 곳은 고물상이었다. 그러나 환영받지는 못했다. ‘손주뻘의 청년이 내게 무슨 관심이 있어 왔을까’ 경계심이 짙었다. 신뢰를 얻을 방법을 고민하던 심 대표는 공신력을 갖고 있는 복지관을 찾아 업무 협약을 맺었다. 폐지를 수집하는 일을 하거나 저소득층인 노인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참여 어르신을 모집했다.

어르신들을 설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온 어르신들은 “난 아무것도 못해. 가라고 해서 왔고, 시간을 내라고 해서 냈다”고 손사레를 쳤다. 어르신들의 그림이 제품이 되고, 그 제품을 판매해 수익금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의 목적과 방향성, 미래에 대해 꾸준히 설명하며 어르신들과 고민을 나눴다. 어르신들의 그림이 입혀진 제품이 판매되고, 수익금을 나누는 과정을 1~2년간 반복했다. 자신의 작품이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된 어르신들은 자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한다”던 어르신의 눈부신 변화
‘신이어마켙’에 참여한 어르신들의 생활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심 대표는 “최근 고물상의 폐지 매입 가격은 1kg당 40~60원가량이다. 수익이 2~3배 이상 늘어난 것”이라며 “폐지 수거를 하던 것보다 형편이 훨씬 나아지셨다”고 말했다.

워라밸(Work-life balance) 또한 좋아졌다. 폐지 수거는 어르신들끼리 경쟁이 심해 새벽에 나가 저녁 늦도록 돌아다녀야만 했다. 최소한의 안전 장비도 없어 사고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신이어마켙’ 제공



신이어마켙에서 근무하는 어르신들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퇴근한다. 퇴근 후에는 동네 친구들도 만나고, 은행 업무도 본다. 주민센터나 복지관에 방문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력 증진 프로그램도 참여한다.

“아무것도 못 한다던 어르신이 한두 달 지나고 나서는 립스틱을 바르고 오신다. ‘여기 오는 게 너무 재밌고 좋아서 시장에서 립스틱을 사서 바르고 왔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어르신들의 가족들도 심적 안정을 느끼며 응원을 보낸다. 심 대표는 “종종 가족들과 연락을 하는데 프로필 사진을 보면 당신의 어머니가 그린 그림을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 두신다. 손주들도 마찬가지”라며 “어르신들의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고 했다.

“다 때가 있다, 기다려봐라”…몸소 느낀 삶의 지혜
어르신들만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평균 연령 83세이지만 열정은 이팔청춘인 어르신들을 보며 심 대표 또한 가르침을 얻는다.

심 대표는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그만하셔도 된다’고 해도 어르신은 ‘좀 더 예쁘게 그리고 싶다’며 엑스를 친다. 항상 ‘이거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정말 열정적이다”라고 말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을 가진 어르신들의 모습은 심 대표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연륜의 지혜를 몸소 느낀 적도 많다. 심 대표는 “팝업 스토어를 열었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손님이 3명밖에 오지 않았다. 조바심이 들어 문 앞을 계속 서성였다”고 회상했다.

어르신은 심 대표에게 “조금 더 기다려봐라. 사람이 올 때가 있을 것인데 그때를 잘 챙겨야지. 벌써부터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난 뒤 1시간이 지나자 행사가 끝날 때까지 심 대표는 앉을 틈도 없이 바빴다. “조급해하는 것만이 다는 아니구나. 그런 경험을 통해 어르신들의 말씀이 귀하다는 걸 느꼈다”고 심 대표는 전했다.

어르신들의 말을 ‘꼰대’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심 대표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상담을 하다 보면 요즘 세대가 싫어할 수도 있는 말들이 있다. 그래도 그대로 낸다. 어르신들은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라며 “가급적 어르신들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세상

‘신이어마켙’ 제공



심 대표는 일할 여력이 되는 어르신들이 맘껏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모든 일하고 싶은 노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심 대표의 목표다.

그는 “민간형 노인 일자리라고 볼 수 있다. 이 안에서 좀 더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다양한 어르신들을 만나 그들에게 일자리를 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인들은 은퇴할 나이인 만 65세가 지나면 일자리가 없어진다. 최소 20년은 지난 기준을 2023년에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며 “65세 이상 어르신들도 일할 수 있는 역량과 체력들이 상당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심 대표는 “어르신들이 8시간 풀타임 근무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어르신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근로 시간의 평균치를 잡아 모델들을 만들어 가면 다양한 어르신들이 같이 일을 하면서 좋은 환경과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도적인 정년은 허물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면 그걸 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며 “저희부터 준비하다 보면 협력할 수 있는 조직들과 기관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김혜린 동아닷컴 기자 sinnala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