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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일도, 위치도 모르는 ‘다라’ 비밀 품은 왕릉[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3-03-07 03:00:00

옥전 M3호분에서 출토된 철제 말투구 2점 가운데 하나. 얇은 쇠판 여러 매를 이어 붙여 만들었다. 길이 49.5cm, 5세기 후반.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우리 역사에서 가야는 ‘미지의 왕국’, ‘잃어버린 왕국’으로 불린다. 가야에 속한 나라가 몇 개국이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국명이 전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가야에 관한 역사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종종 등장하는 다라(多羅)의 경우가 그러하다.

다라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근거로 활용된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에 왜(倭)가 평정했다고 기록된 가야 7국 가운데 하나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다라가 합천에 자리했던 것으로 비정해왔지만 실증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1985년 합천군 쌍책면의 한 고분 발굴 현장에서 다라의 실체가 드러났다.


숲속 폐고분서 쏟아진 유물들
1985년 7월, 경상대박물관 조사팀은 문화재 지표조사에 나섰다가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마을에서 도굴로 쑥대밭이 된 고분군을 발견했다. 넉 달 후 ‘성산리 가야 폐고분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대상으로 삼은 660㎡(약 200평)에 10여 기의 고분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으나 발굴을 시작하니 50여 기의 무덤이 묻혀 있었다. 발굴 후 이 유적은 옥전고분군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됐다.

1987년 11월에 시작한 2차 발굴에서는 봉분 지름이 21.6m에 달하는 M3호분을 파기로 했다. 봉분 곳곳에 도굴 흔적이 있어 큰 기대를 품지 않았지만 곧이어 반전이 일어났다. 무덤 바닥에 수백 점의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덤 구조를 모르는 도굴꾼이 무덤 바닥까지 파내려가지 않고 중도에 철수한 것이다.

옥전 M3호분에서 출토된 용과 봉황무늬가 장식된 큰칼의 손잡이 부분. 실제 전장에서 쓰이는 무기라기보다는 최고 권력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이었다. 맨 위쪽 둥근 고리 지름 6.3cm, 5세기 후반.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목관이 안치된 공간에는 당시 화폐처럼 통용되던 쇠도끼가 121점이나 깔려 있었다. 그와 함께 야장(冶匠)의 심벌인 쇠망치, 쇠집게, 숫돌이 출토되었다. 또 금귀걸이 3쌍, 용과 봉황 무늬가 새겨진 큰 칼 4자루, 금동제 투구와 철제 갑옷, 말 투구와 말 갑옷 등 범상치 않은 유물이 다량으로 쏟아졌다.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의 왕릉급 무덤에서 이만큼 탁월한 부장품을 갖춘 사례는 없다. 조사단장인 조영제 교수는 이 발굴 성과와 합천 일대 고분 분포 양상, 이웃한 마을 이름이 ‘다라리(多羅里)’라는 점 등을 연결 지으면서 이 무덤 주인공을 다라 왕으로 특정했다.


도굴꾼이 흘린 ‘명품 귀걸이’ 한 짝

옥전 M11호분에서 출토된 금귀걸이 한 짝. 백제에서 만들어져 다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길이 9.1cm, 6세기 중엽.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3차 발굴은 1989년 4월에 시작됐다. 발굴 대상은 봉분이 가장 큼지막한 M11호분이었다. 조사 결과 이 무덤은 이전에 발굴된 무덤들과는 구조가 달랐다. 여타 무덤은 망자가 지하에 묻혔지만 이 무덤의 경우 지상식이며, 큼지막한 석실에 길쭉한 석축 널길을 갖춘 백제식 석실분이었다.

내부는 최소 3차례 이상 도굴되어 제 위치에 남아 있는 유물은 거의 없었다. 다만 도굴꾼이 파헤친 흙더미 속에서 몇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조사원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단연 금귀걸이 한 짝이었다. 원래는 한 쌍이었을 텐데 다른 한 짝은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귀걸이가 공개되자 학계에서는 이 귀걸이가 국보로 지정된 백제 무령왕비 귀걸이와 스타일이 유사하다고 지적하면서 백제 왕이 다라 왕에게 제공한 선물로 추정하였다.

M11호분은 옥전고분군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축조된 왕릉급 무덤이다. 무덤의 구조뿐만 아니라 출토 유물에서도 백제적 색채가 확인되므로 6세기 중엽 신라의 서진에 위기감을 느낀 백제가 가야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백제 편이 아니었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목숨을 잃자 무게추는 급격히 신라로 기울었고 끝내 가야는 신라에 복속됐다.


동로마 유리그릇, 누가 가져왔나
옥전고분군 발굴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다라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촉발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이 고분군이 도굴의 표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1991년 4월, 경상대박물관 연구원들이 현장을 찾았을 때 발굴되지 않은 대형분 곳곳에 도굴 구덩이가 뚫려 있음을 목도했다.

옥전 M1호분에서 출토된 유리잔이다. 옅은 녹색을 띠는 유리그릇으로 표면에는 23개의 남색 점이 표현돼 있다. 동로마에서 제작된 전형적 로만글라스에 해당한다. 입지름 9.7cm, 5세기 중엽.국립진주박물관 제공 

7월 22일, 긴급 발굴에 착수하여 도굴된 M1호분에 대한 정밀 조사에 나섰다. 무덤 바닥에 다다르니 도굴꾼들이 이미 M3호분 발굴 정보를 학습한 듯 깊게 파들어가 많은 유물을 쓸어간 상태였다. 그나마 일부 도굴의 손길을 피한 곳에 일부 유물이 남아 있었다. 말 갑옷 주변을 노출하던 한 조사원의 시야에 유리 조각 하나가 들어왔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덤이 교란되면서 근대 이후의 유리 조각이 내부로 쓸려든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버리지 않고 수습한 다음 말 갑옷을 통째로 떠서 박물관으로 옮겼다. 일부 조사원이 박물관 연구실에서 흙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영롱한 빛을 띤 유리잔이 전모를 드러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동로마에서 제작된 온전한 유리그릇은 경주의 신라 왕족 무덤에서 간간이 출토될 뿐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거의 출토되지 않는 희귀품이었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에서 신라계 유물이 많이 보이는 점에 주목하며, 이 유리잔도 신라를 거쳐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옥전고분군과 그 주변에 대한 발굴은 근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삼한 시기까지 소급하는 무덤들이 확인되기도 했다. 또 고분군의 분포 범위가 당초의 예상보다 넓다는 점, 그리고 인접한 성산토성이 다라의 왕성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다. 옥전고분군은 국명 하나 겨우 남기고 사라진 다라를 멸망 1400여 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으며, ‘다라는 결코 왜에 평정되지 않았음’을 웅변해주었다. 장차의 연구에서 다라가 무엇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고령 대가야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백제나 신라는 왜 다라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 등 다라를 둘러싼 여러 비밀이 차례로 해소되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