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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노동으로서의 ‘돌봄’을 생각하다

입력 | 2022-10-15 03:00:00

◇사랑의 노동/매들린 번팅 지음·김승진 옮김/468쪽·2만2000원·반비




하교 후 집에 와보니 문이 잠겨 있다. 그땐 옆집으로 가면 된다. 옆집 아주머니는 자연스럽게 이웃집 아이의 저녁을 챙겨 준다. 아이는 이웃에게 보호받으며 부모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탄탄했던 한국 사회 특유의 ‘옆집 돌봄’ 네트워크는 전래동화가 된 지 오래다. 팬데믹으로 어린이집이 휴원하는 등 예측 불가능한 돌봄 공백 상황에 대응할 여력이 있는 맞벌이 부부는 많지 않다. 특히 주변에 도와줄 조부모나 베이비시터가 없다면 한 손에 육아와 집안일을, 다른 한 손에 직장 일을 들고 펼치던 불안한 저글링은 곧바로 중단되고 만다.

책은 ‘돌봄의 위기’를 직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육아, 간병, 간호 등 돌봄과 관련한 여러 분야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고령화와 맞벌이 부부의 증가 등으로 돌봄 수요는 폭증하고 있지만 공공 돌봄 서비스를 받으려면 대기표를 쥐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 문제는 결국 가족이 무보수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식으로 해결되기 일쑤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부편집장을 지낸 저자는 2015년의 한 통계를 근거로 영국에서 환자와 노인에게 제공된 무보수 돌봄 노동의 가치가 연간 206조 원에 달한다고 말한다.

2017년 영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돌봄 노동자의 자살률은 평균 자살률의 2배였다. 돌봄 노동을 저임금으로 후려치는 등 평가 절하하는 문화가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저자는 “우리 사회는 돌봄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전통적으로 가내 돌봄으로 시작된 돌봄 노동은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치부돼 왔다. 돌봄 노동을 애써 가려놓는 ‘문화적 가림막’이 존재하는 셈이다.

저자의 육아 경험을 비롯해 자녀를 돌보는 부모, 부모를 돌보는 자녀, 간병인, 간호사, 의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의 돌봄 현장 이야기를 5년간의 심층 취재로 생생하게 담았다. 돌봄의 위기와 원인을 진단하는 동시에 돌봄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문화는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짚어본다. 돌봄 노동을 과도하게 추켜세우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돌보고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돌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저자의 진심이 돋보인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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