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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압도적 지정학과 밴댕이 정치Ⅱ…압도적 영화 ‘한산’

입력 | 2022-09-10 10:00:00


“간절히 청컨대 대답해 주시오. 대체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의(義)와 불의의 싸움이지.”
“나라와 나라와의 싸움이 아니란 말입니까.”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은 바로 답하지 않는다. 대단원에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아니다. 더 나아가자. 지금 우리에겐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하다.”

나라와 나라의 싸움은 아니라 해도 일본은, 또 중국은 제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하필 이 나라에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에 따라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는 뒤바뀌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지정학은 운명처럼 압도적이었고 그에 비해 국내정치는 밴댕이처럼 쪼잔해 보인다.

영화 ‘한산:용의 출현’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지정학에는 ‘의(옳을 義)’가 없다
‘한산’을 본 뒤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일본은 가만있는 우리나라를 쳐들어왔을까? 불의해서?

학교 때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에 성공한 뒤 남아도는 무력을 국외로 돌려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배웠다. 공명심에 대륙침략의 망상에 빠졌다고도 했다.

이렇게 보면 나쁜 놈 하나만 제거하면 평화는 이룩된다. 그러나 최근 한일연구는 16세기 동아시아 정세 변화의 흐름 속에 임진왜란을 파악하는 추세다. 특히 일본에선 정유재란의 원인을 일본 군수경제를 위한 조선 남부 경상도 지역의 영토 확보와 동아시아 무역 재개에 있다고 본다고 상명대 김문자 교수는 2020년 논문에서 밝혔다. 결국 교역과 경제안보가 관건이었던 셈이다.

영화 ‘한산:용의 출현’에서 왜병 준사(오른쪽)는 이순신 장군의 희생적 리더십에 감명해 조선에 투항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16세기나 21세기나 교역과 경제안보는 중요
유교적 문약(文弱)에 빠져 빈곤도 자랑스러워하는 조선이나 교역과 담을 쌓고 살았지,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 대항해의 시대, 일본은 송나라 원나라와 활발히 교역했는데 명나라는 ‘조공무역’으로 돌아서면서 민간의 해상무역을 금지했다.

우리 조상은 일본을 ‘성인의 교화를 받은 적 없다’며 우습게 봤지만 당시 일본은 세계 은 생산액의 3분의 1을 산출하는 부유한 나라였다. 일본을 재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국을 중국과 동등한 나라로,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했다. 1차 전쟁 목적인 명 정복이 어려워지자 나중엔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필리핀까지 이어지는 동아시아 지역의 통상권을 주도하려 했다는 거다.

임진왜란은 그냥 과거가 아니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과 6·25전쟁을 거치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체제에 편입됐지만 중국은 다르다. 10월 제20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3연임이 예상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과거 중화제국의 부흥, 조공질서의 부활을 공언한다. 최근 글로벌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간 전략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당장 우리 발등에 떨어진 전기차와 반도체 수출 문제까지 돌아보면, 좁만한 권력다툼에나 골몰하는 정치판은 예나 지금이나 뭐가 다른가 싶어진다.

● 당의 한반도 정복이었나, 신라의 통일이었나 
‘한산’에 명나라까진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지만 실은 ‘하찮은 속국 원조’가 아니라 요동과 북경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광해군 때 명나라는 밝혔다. 6·25 전쟁 때 북한을 위해 참전했다는 중공군을 연상케 하는 발언이다.

중국은 과거에도 이 땅에서 일본과 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동북아 분야 석학 에즈라 보겔은 “660년 당나라가 동맹인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침입하자 백제는 일본에 원조를 요청했다”고 2019년 저서 ‘중국과 일본’에 썼다. 왜까지 참전한 백강전투에서 승리한 중국은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다 신라에 의해 대동강 이북으로 물러났다.

이후 왜는 압도적 당나라군에 패전한 경험에서 말을 길러 기마공격을 벌이게 됐고, 그 힘으로 신생 일본국을 수립해 번영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우리는 학교 때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고 배웠지만 세계적 시각에선 달랐던 거다.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저서 ‘중국과 일본’에서 “660년 당나라가 동맹인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침입하자 백제는 일본에 원조를 요청했다”고 썼다. 동아일보DB



● 달라지지 않는 중국, 강대국의 실체
명나라는 1593년 벽제전투에서 일본에 패하자 조선과 상관없이 일본과 강화교섭에 들어간다. 자강의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조선에 대해선 문약을 극복하고 무비(武備)를 키울 것, 은광(銀鑛)을 개발하고 화폐를 유통시켜 국부(國富)를 키울 것, 세금을 경감하고 형벌을 절제해 백성들을 안정시킬 것, 노비를 해방시키고 인재를 등용할 것 등을 주문했다.

틀린 말 하나 없어 가슴이 내려앉는다. 하지만 명나라는 자국의 화기를 빠짐없이 거둬갔고, 조선이 습득을 열망했던 염초 제조법 등을 끝내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것이 중국이고, 오늘날도 달라지지 않은 강대국의 실체다.

당나라가 한반도를 정복하려다 신라에 의해 대동강 이북으로 밀려난 것처럼, 일본도 애초 강화조건으로 조선 팔도 중 대동강 아래 남쪽 4도를 요구했다. 6·25 때 중국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대동강 이북으로 넘어오면 참전한다는 신호를 날리기도 했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다는 한반도 지정학은 이 나라가 약해질 때마다 넘어져 죽을 만큼 발등을 찧곤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총사령관(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1950년 9월 15일 USS매킨리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주한미군기지관리사령부 제공 



●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의’다 


일본의 식민지로, 6·25로 폐허가 됐던 이 나라가 세계 10대 무역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건 기적적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그 안에서 국방 아닌 경제에 전념할 수 있었던 동북아의 실용주의적 리더들이 평화와 번영을 지킬 수 있었다. 미-중 간 그레이트 게임은 글로벌 교역이 전쟁을 막는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을 깨고 보호무역주의로 돌려세우고 있다.

지정학에는 ‘의’가 없을지 모른다. 국제관계에선 이(利)만 있을지 몰라도 인권, 자유,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는 국민에게는 분명 ‘옳을 의’다(권력자에게는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대국, 너희는 소국”이라는 패권국가에 더는 머리 조아리지 않는 정치를 보고 싶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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