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심정섭씨 본지에 공개 ‘지방 관찰사에 관리 천거’ 내용 中유해 봉환 위해 서훈 추서 필요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심정섭 씨가 9일 동농 김가진 선생의 친필 서신을 동아일보에 공개하며 선생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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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3주년을 맞아 최고령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동농(東農) 김가진 선생(1846∼1922)의 친필 서신이 공개됐다.
독립운동사 연구가이자 향토사학자인 심정섭 씨(79)는 10일 김 선생이 직접 작성한 편지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선생이 1895년 3월 26일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현재의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취임을 앞두고 도지사 격인 지방 관찰사에게 ‘최생원’이라는 선비를 지방관리로 천거하는 내용이다.
김 선생은 편지에서 “최생원은 명문가의 후예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인재”라고 소개했다. 편지 작성 1년 전인 1894년 갑오개혁 직후 대한제국 관료 제도가 현대식으로 개편되면서 지방관리 명칭이 아전에서 주사로 바뀌었는데, 편지엔 그 표현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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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은 1919년 5월 비밀 항일결사인 대동단을 조직해 총재가 된 뒤 은밀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 활동이 힘들어지자 같은 해 10월 아들 김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했다. 며느리 정정화 선생도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6차례 조달한 밀사였다.
당시 임시정부에 망명한 최고령, 최고위직 관료가 김 선생이었다. 그때 일제는 “대한제국 관료나 조선 왕족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경술국치를 찬성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부랑아들이 모인 단체”라고 비방했다. 하지만 김 선생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뒤 고문으로 추대되자 일제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났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세우는 한 계기가 됐다.
선생은 대동단 본부를 상하이에 다시 설치한 뒤 일제에 포고문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하는 등 힘든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 1922년 7월 상하이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부부와 대동단 단원 등 80여 명은 서훈을 받았지만 선생은 25년 동안 서훈을 7차례 신청했지만 유보됐다.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 등에서다. 특히 올해는 김 선생이 별세한 지 100년 된 해이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 중국 상하이(上海)에 묻혀 있다.
역사학자들은 김 선생 유해의 국내 봉환을 위해 서훈 추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보다 숲 전체를 본다는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선생의 삶에서 독립운동가의 면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며 “선생은 새해가 되면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한 글을 썼다. 대한민국 백성으로 내 나라 정부가 있는 곳에서 죽겠다는 말을 항상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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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