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어서면 나직이 벨소리가 들려온다. 수화기를 들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엄마, 엄마 딸 여자친구 있어.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었어. 사랑해.”
목소리의 주인공은 몇날 며칠 전, 전시장에 놓인 공중전화부스에 비밀을 털어놓고 간 또 다른 관람객이다. 수화기를 매개로 관객은 이름 모를 이의 가장 깊숙한 이야기를 듣는다.
설은아 작가(47·사진)가 기획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전시 이야기다. 설 작가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석파정 서울미술관, 소다미술관 등에서 여덟 차례 해당 전시를 해왔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만 10만 여명의 관람객을 기록하는 등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3년간 모인 통화만 9만7934통. 설 작가는 이 목소리들 중 가장 애정 하는 450개의 통화 내용을 모아 지난달 25일 동명의 책(수오서재)을 발간했다.
이어 그는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일지라도 세상 누군가는 선입견 없이 듣는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실험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전시가 발화자를 위한 공간이었다면, 책은 청취자를 위한 물건이다. 설 작가는 “힘들 때 위로가 되는 건 ‘괜찮아 힘내’가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이 보편적인 아픔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며 “(관객이)수많은 이야기 중에 자신과 공명(共鳴)하는 이야기들을 선물처럼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가의 역할은 지구 반대편 세상의 끝인 듯한 공간에 그 목소리들을 놓아주는 것까지다. 그는 2018년 첫 전시를 마치고 2019년 아르헨티나 최남단의 마을 우수아이아에 가 관객들의 음성 메시지를 틀어놓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모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설 작가는 2019년부터 모인 목소리들을 놓아주러 지난 5일에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으로 떠났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