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사학자, 北中고고발굴대 일기서 “北, 낙랑군 위치 中서 은폐 의심” 北, 고조선 성터 탐색서 갈등 시작… 몽골까지 고조선 영토 상정하려 해 양국, 공동보고서 안 내고 갈라서… 中은 ‘고고발굴대 역사’ 지워버려
1963∼1965년 북한과 중국이 공동 조직한 ‘조·중고고발굴대’에서 중국 측 연구대장인 고고학자 안즈민(오른쪽). 강인욱 경희대 교수 제공
“북-중이 역사 문제에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민족 감정으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1963년 4월 23일 안즈민의 일기)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한중 역사 갈등이 1960년대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 중국 고고학자 안즈민(安志敏·1924∼2005)의 일기를 통해 밝혀졌다. 1963∼1965년 북한과 중국이 공동 조직한 조·중고고발굴대에서 중국 측 연구대장을 맡았던 그의 일기에는 고조선사를 놓고 북-중이 벌인 신경전이 담겼다. 2020년 중국에서 출간된 안즈민의 일기가 국내에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18일 경희대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와 고조선부여사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안즈민의 일기를 통해 북-중 고대사 갈등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출신인 안즈민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발굴을 주도한 중국 고고학의 초기 세대를 대표한다.
1963년 9월 27일 안즈민의 일기에는 북측 학자들이 “중국이 낙랑군의 소재를 알고도 숨기는 거 아니겠느냐”며 중국 측과 논쟁한 정황도 담겼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군으로, 낙랑군의 위치는 고조선 강역을 규명할 핵심 열쇠였다. 북한이 고조선 강역을 규명하기 위해 발굴대를 조직했다는 의중이 명확히 드러난 셈이다. 북한의 의중을 알아차린 중국은 통역원을 정보원으로 두고 감시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낙랑군의 위치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신경전의 중심에는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양보할 수 없는 양국 갈등이 존재했다. 북한이 고조선사에 집중하게 된 건 1956년 소련이 출판한 ‘세계통사’ 때문이다. 이 책에는 중국에서 온 낙랑군이 한반도에 유입돼 한반도 역사가 시작됐다는 일제식민사관 서술이 그대로 담겼다. 북한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역사 인식이 북한의 자주성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북한은 고조선 도성이 평양에 있다는 당대 일부 북한 학계의 주장에서 벗어나 왕검성이 중국 랴오둥 지역에 있었음을 입증해 민족사의 자주성을 세우려 했다.
1964년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에서 조·중고고발굴대가 무덤을 발굴하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 발굴된 ‘누상(樓上) 무덤’은 기원전 7∼5세기경 고조선의 유적으로 조사됐다. 무덤에서는 고조선대 유물인 비파형 동검 등이 나왔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 제공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한중 고대사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강 교수는 “변방을 다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족 문명의 역사가 확산된 곳으로 규정하는 중국의 팽창적 역사관은 60년 전 북한과 고조선사를 둘러싼 분쟁의 반작용에서 본격화됐다”며 “조·중고고발굴대는 한중 고대사 분쟁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