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김정일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사이에 회담이 진행됐다. 막후에서 회담을 성사시킨 주역인 류경 보위부 부부장은 김정일의 분노를 사 처형됐다. 동아일보DB
광고 로드중
주성하 기자
광고 로드중
북한에서 숨은 실세로 꼽히다가 하루아침에 처형된 대표적 인물이 류경 보위부 부부장이다. 그는 2010년 12월 한국에 김정일의 특사로 파견됐다가 돌아간 뒤 얼마 안 돼 처형됐다. 당시 한국 언론은 그가 간첩죄로 처형됐다고 보도했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설명이었다.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 대남특사까지 될 정도면 북한 정권을 위해 많은 공로를 세웠을 것인데, 간첩이라면 그토록 충성을 다할 수 있었을까.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류경의 처형 이유는 국가보위부에서 10년을 근무했고 류 씨와 술을 마신 적도 있는 탈북민 구대명 씨가 최근 자서전 ‘거품’을 펴내면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류경은 평양에 돌아가 함께 파견됐던 대표단원들과 짜고 마치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보고서를 작성해 김정일에게 올렸다. 그런데 대표단원 중 한 명이 상부에 이실직고(以實直告)하는 바람에 자신이 속았다고 분노한 김정일이 류경을 처형했다는 것이다.
당시 정황에 대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는 이렇게 언급돼 있다.
광고 로드중
이 전 대통령과 구 씨의 설명을 종합하면 류경이 왜 처형됐는지 윤곽이 그려진다. 당시 류경은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라는 김정일의 밀명을 받고 한국에 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만나주지 않자 류경은 자의적으로 하루 더 머물며 성과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평양에 돌아간 류경은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질책이 두려워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고, 남쪽에서 긍정적인 답변도 받았다”는 식의 거짓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추정컨대 남쪽에 한 번 더 내려와 거짓말을 만회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같이 왔던 부하 4명 중 한 명이 밀고하는 바람에 화를 당했다.
그렇다면 류경은 왜 그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류경이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그는 북한에서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최고의 전문가였다. 이런 점 때문에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 북한 최고의 공화국영웅 훈장을 2번이나 받았다.
구 씨에 따르면 류경은 1990년대 후반 보위부 해외반탐처에서 중국 담당 지도원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해외에 안전대표로 파견되게 됐다. 북한 대사관엔 안전대표라는 직책이 있는데, 이는 보위부 해외파견원을 위한 자리다. 안전대표 선발 면담 과정에서 그의 명석함을 알게 된 상부에선 해외에 파견하는 대신 보위부 내부에서 승진시켜 각종 임무를 맡겼다. 그때부터 류경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광고 로드중
이렇게 회담 성사로 승승장구해 온 류경이니 남쪽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쉽게 보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김정일은 가장 믿었던 심복에게 배반당해 분노가 몇 배로 컸던 것으로 보인다.
류경은 처형됐고, 가족은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류경과 함께 남쪽에 내려온 사람 중 밀고한 사람을 빼곤 나머지 사람들의 운명도 같았을 것이다. 분노한 김정일은 보위부에 “류경 여독(餘毒·남은 잔재)을 청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류경의 심복으로 꼽힌 수십 명이 또 영문도 모르고 처형됐고, 가족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북에선 영문도 모르고 줄을 잘못 섰다가 처형되고 멸족되는, 이런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것 같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광고 로드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