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동아일보 DB
● 부처간 예산배정 갈등에 ‘올스톱’
고 이 회장 유족은 올 4월 의료 분야에 총 1조 원을 기부했다. 이 중 3000억 원은 소아암과 희귀질환 환자를 위해 써달라며 서울대병원에 기부했다. 정부는 나머지 7000억 원을 받아 5000억 원은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에, 2000억 원은 코로나19 백신 등 감염병 연구에 쓰기로 했다.
하지만 24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보건복지부는 아직도 중앙감염병병원의 구체적인 건립 방향과 기부금의 운영 방식을 논의할 ‘기부금운영위원회’조차 구성하지 않았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6월 운영을 시작했어야 했다.
● 의료계 “탁상 행정으로 발목 잡나”
의료계는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타하고 있다. 고 이 회장의 유족 측이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을 지어달라’고 따로 요청한 만큼 정부 예산이 확정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국내외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건립 방향을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왔다고 해서 정부가 이미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에 배정했던 예산을 빼서 다른 곳에 쓰는 것이 과연 기부자의 뜻에 부합하는지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이 종식된 뒤 감염병 전문병원 논의가 유야무야된 것처럼,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관련 논의 자체가 허공에 뜰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메르스 직후 정부는 ‘국가방역체계 개편방안’을 발표하면서 감염병 전문병원을 짓겠다고 했지만 그해 국회는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이후 다시 어렵사리 적정성 검토를 통과했지만 아직 설계 착수도 못한 상태다. 정기석 한림대 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줄어도 다른 신종 감염병이 유행하는 건 시간문제”라며 “그제야 ‘진작 건립할 걸’이라며 한탄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협의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은 이날 ‘공공 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국회 심포지엄’에 참석해 “(이 회장의 기부금을 두고) 온갖 이해 관계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라붙고 기재부는 자기 돈인 양 ‘검증하겠다’고 나서는데 복지부의 정책 의지는 실종된 상태”라며 “하루 빨리 감염병병원을 만들겠다던 약속은 어느덧 휴지조각이 됐다”고 비판했다.